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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Dec 30. 2022

조급함, 분노, 유전이야!?

가장 추운 날의 외출이야기

대낮에도 영하 8도에 육박하는 몹시 추운 날이었다. 상호대차 신청해 놓은 책이 있어 도서관에 가야 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아들은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었고,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를 읽던 중이어서 여덟 권 중에 6권을 상호대차 신청해 놓았다. 가까운 도서관에는 <드래곤 라자>가 없었다. 글로만 된 책을 읽는 것이 기특해서 여러 권, 몇 번이고 빌려다 줄 마음이었지만, 곧 이사를 가면 빌린 책을 반납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한 권만 신청했다.


도서관은 아들의 학교 근처에 있었다. 아들의 하교 시간보다 4-50분 일찍 집을 나서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차로 도서관을 가는 데는 10분가량 걸리기 때문에 여유 있게 가도 됐다. 그런데 이 날따라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조급하게 운전을 해서 다른 차들이 경적을 울리게 만들었다.


도서관 내 주차장은 너무 좁아서 어차피 주차를 할 수 없었기에, 도서관 옆 주차 길목으로 들어섰다. 이 길은 양쪽으로 차가 주차되어 있어서 가운데로는 차가 한 대밖에 지나갈 수 없는, 조심해서 통과해야 하는 좁은 길이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들어가고 싶은 길이 아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마침 도서관 가까운 쪽에 차를 두 대는 세울 수 있는 빈자리가 있었다. 도로에 최대한 가깝게 차를 붙여서 주차를 했다. 밖에 서 있는 자체가 냉동실에 있는 듯 꽁꽁 언 날이었다. 얼른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종합열람실로 가서 상호대차 신청한 책을 받았다. 대여해 주기에는 지나치게 낡은 책이어서 좀 아쉬웠다. 책도 빌렸겠다, 이제 아들의 전화가 올 때까지 책들을 둘러보면서 기다리면 되었다.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20분쯤 책을 읽고 있으려니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를 위한 책을 한 권 더 빌린 뒤 도서관 출입문 앞에서 아들을 만났다.


차 안으로 들어가 시동을 걸 때쯤 비어있던 앞 주차 자리에 차를 대려는 사람이 있었다. 전기차였다. '조금만 늦게 오지, 내 차가 나간 뒤에.' 하는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주차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젊은 청년이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는데, 이런! 그러고 보니 차를 뒤차인 내 차에 너무 바짝 붙여서 대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얼른 청년을 붙잡아 차를 조금만 앞으로 대 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걸,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차 주인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난, 제대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느끼며 차를 빼려고 시도했다. 내가 타는 모습을 분명히 봤을 텐데, 이렇게 바짝 붙이다니!

 나는 어떻게든 차를 빼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차에 전방 센서가 있어서 앞차 및 앞차와 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맞은편 차에 너무 가까이 가면 경고등이 울린다는 것.

세 번 정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하면서 겨우 주차공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주 아주 천천히. 가슴 졸이며, 식은땀도 났다. 아마 이 짧은 시간에 내 스트레스지수는 100 가까이 올랐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버벅대는 동안 맞은편이나 뒤편에서 차가 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던지. 맞은편에서 차가 들어오면, 나는 빼려고 했던 내 자리로 다시 들어가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을 테고, 뒤 쪽에서 차가 오면, 미안한 마음에 빨리 차를 빼려고 하다가 앞차를 긁는 실수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차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구시렁대며, 차를 뺄 수 있음에 안도감을 느끼며 좁은 도로를 천천히 운전해서 통과했다. 지나갈 때 보니, 앞 차와 그다음 앞차 사이의 간격이 아주 넓어 보였고, 나는 이것을 보자 한번 더 화가 났다. 이렇게 넓게 주차를 하려고 내 차에 바짝 붙여서 나를 힘들게 하다니! 나는 혼자 분을 삭이느라고, 어휴! 어휴! 하며 두 주먹을 쥐고 허공에다 헛손질을 해댔다. 그러다 문득 나의 이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뒷자리의 아들이 생각났다. 아무 말 없이, 아마도 폰을 보고 있을 아들이.


난 민망한 마음에 "내가 너 짜증 내듯이 짜증 내고 있다" 하며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러자 아들 하는 말."유전이야!" 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뭐라구?" 하고 되물었더니, "유전이라고." 앞뒤 자르고 말하는 버릇이 있는 아들의 말을 유추해 보자면, 내가 쿵쾅거리며 씩씩거리는 걸 자기가 닮아서 자기도 성질이 나면 그렇게 행동한다는 뜻이었다. 난 좀 어이가 없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아니 그러니까, 앞차가 조금만 더 앞쪽으로 주차해 줬으면 좋았잖아. 뒤차 생각은 안 하냐고!"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해명을 했다. 그랬더니 아들 하는 말."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구." 이런다. 자신이 판단할 바는 아니라는 뜻이다.

난 아들 앞에서 성질낸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기분을 가라앉히고 싶어서, 빌린 책 얘기를 했다. "근데, 빌린 책이 너무 낡아서 네가 읽다가 더 망가지겠는데, 어떡하지, 책 커버라도 씌워야 하나? 옛날에 엄마는 책 아끼려고 달력종이를 씌워서 읽기도 하고 그랬는데, 책 뭐로 한번 씌워줄까?"


집에 왔을 때는 스트레스받았던 일이 다시 생각나 냉장고에서 차가운 사과즙 하나 꺼내어 홀짝홀짝 마시고, 그러면서 남편에게 잠시 하소연을 했다. 혹시 차에 생채기나 내지 않았는지 경계의 눈빛을 하는 남편에게.


 따지고 보면 내 차 앞에 주차한 차 주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가 필요한 대로 자기 차가 나가기 쉽게 주차를 한 것뿐이다. 뒤차를 생각해서 어느 정도 띄어서 주차할 만한 배려를 안 가졌다고 '너 왜 그랬어?' 하고 항의할 상대는 아닌 셈이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주차하고 말았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스트레스받고 애써야 했던 나의 곤경에 화가 나서 그 화살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던 것뿐이다.


주차 스트레스에 대한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야 했다. 괜히 내 정신건강만 나빠질 테니. 마침 빌린 책은 읽기 위해 조치가 필요한 상태였고 난 그것에 마음을 쓰기로 했다.




오늘 빌린 <드래곤 라자> 6권은 정말 많이 낡아서 그냥 보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두꺼운 책 표지에서 가루가 날릴 것 같은, 폐기하고 다시 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책 커버를 씌워주고 싶어서 마땅한 종이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올해의 달력 종이는 이미 버려버렸고, 새 달력의 첫 장은 1월로 돼 있어서 뜯을 종이가 없었다. 이사 준비 때문에 대부분의 큰 종이들은 이미 처분한 뒤였다. 나는 고심하며 두리번거리다가, 아이스크림을 배달받았던 종이가방에 눈길이 갔다. 핑크색에 캐릭터가 예쁜, 도톰한 종이가 왠지 책 포장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끈을 떼어내고 접합된 부위들을 뜯어서 펴니 길쭉하고 튼튼한 종이가 되었다. 지저분한 곳을 잘라내고 책을 씌워서 매직테이프로 고정시켰다. 제법 그럴듯한 북커버가 되었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난 뿌듯한 마음을 느끼며 아들에게 갖다주고 열심히 읽으라고, 두 주 안에 읽고 반납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렸을 적에는 달력 종이로 교과서도 포장해서 썼던 적이 있었다. 책장에 있는 책들 중 몇 권은 아직도 내가 오래전에 포장했던 채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표지가 너무 얇은 경우 아껴 읽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요즘은 비닐이나 가죽으로 된 북커버도 나온다. 책을 끼워서 읽고, 다른 책을 다시 끼워서 읽을 수 있다.


 낡은 책으로 인해서 그 옛날 책을 씌워서 사용했던 추억을 되새겨 보았다. 책 표지를 씌우는 일은 나름 힐링이 되어 오늘 겪었던 주차 스트레스를 거의 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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