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에도 영하 8도에 육박하는 몹시 추운 날이었다. 상호대차 신청해 놓은 책이 있어 도서관에 가야 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아들은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없었고,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를 읽던 중이어서 여덟 권 중에 6권을 상호대차 신청해 놓았다. 가까운 도서관에는 <드래곤 라자>가 없었다. 글로만 된 책을 읽는 것이 기특해서 여러 권, 몇 번이고 빌려다 줄 마음이었지만, 곧 이사를 가면 빌린 책을 반납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한 권만 신청했다.
도서관은 아들의 학교 근처에 있었다. 아들의 하교 시간보다 4-50분 일찍 집을 나서서 도서관으로 향했다. 차로 도서관을 가는 데는 10분가량 걸리기 때문에 여유 있게 가도 됐다. 그런데 이 날따라 빨리 가고 싶은 마음에 조급하게 운전을 해서 다른 차들이 경적을 울리게 만들었다.
도서관 내 주차장은 너무 좁아서 어차피 주차를 할 수 없었기에, 도서관 옆 주차 길목으로 들어섰다. 이 길은 양쪽으로 차가 주차되어 있어서 가운데로는 차가 한 대밖에 지나갈 수 없는, 조심해서 통과해야 하는 좁은 길이었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들어가고 싶은 길이 아니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마침 도서관 가까운 쪽에 차를 두 대는 세울 수 있는 빈자리가 있었다. 도로에 최대한 가깝게 차를 붙여서 주차를 했다. 밖에 서 있는 자체가 냉동실에 있는 듯 꽁꽁 언 날이었다. 얼른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종합열람실로 가서 상호대차 신청한 책을 받았다. 대여해 주기에는 지나치게 낡은 책이어서 좀 아쉬웠다. 책도 빌렸겠다, 이제 아들의 전화가 올 때까지 책들을 둘러보면서 기다리면 되었다.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20분쯤 책을 읽고 있으려니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를 위한 책을 한 권 더 빌린 뒤 도서관 출입문 앞에서 아들을 만났다.
차 안으로 들어가 시동을 걸 때쯤 비어있던 앞 주차 자리에 차를 대려는 사람이 있었다. 전기차였다. '조금만 늦게 오지, 내 차가 나간 뒤에.' 하는 아쉬운 마음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주차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젊은 청년이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는데, 이런! 그러고 보니 차를 뒤차인 내 차에 너무 바짝 붙여서 대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얼른 청년을 붙잡아 차를 조금만 앞으로 대 달라고 했으면 좋았을 걸,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이 차 주인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난, 제대로 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느끼며 차를 빼려고 시도했다. 내가 타는 모습을 분명히 봤을 텐데, 이렇게 바짝 붙이다니!
나는 어떻게든 차를 빼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차에 전방 센서가 있어서 앞차 및 앞차와 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맞은편 차에 너무 가까이 가면 경고등이 울린다는 것.
세 번 정도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를 반복하면서 겨우 주차공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주 아주 천천히. 가슴 졸이며, 식은땀도 났다. 아마 이 짧은 시간에 내 스트레스지수는 100 가까이 올랐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버벅대는 동안 맞은편이나 뒤편에서 차가 오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던지. 맞은편에서 차가 들어오면, 나는 빼려고 했던 내 자리로 다시 들어가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을 테고, 뒤 쪽에서 차가 오면, 미안한 마음에 빨리 차를 빼려고 하다가 앞차를 긁는 실수를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차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구시렁대며, 차를 뺄 수 있음에 안도감을 느끼며 좁은 도로를 천천히 운전해서 통과했다. 지나갈 때 보니, 앞 차와 그다음 앞차 사이의 간격이 아주 넓어 보였고, 나는 이것을 보자 한번 더 화가 났다. 이렇게 넓게 주차를 하려고 내 차에 바짝 붙여서 나를 힘들게 하다니! 나는 혼자 분을 삭이느라고, 어휴! 어휴! 하며 두 주먹을 쥐고 허공에다 헛손질을 해댔다. 그러다 문득 나의 이 행동을 지켜보고 있을 뒷자리의 아들이 생각났다. 아무 말 없이, 아마도 폰을 보고 있을 아들이.
난 민망한 마음에 "내가 너 짜증 내듯이 짜증 내고 있다" 하며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러자 아들 하는 말."유전이야!" 난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돼, "뭐라구?" 하고 되물었더니, "유전이라고." 앞뒤 자르고 말하는 버릇이 있는 아들의 말을 유추해 보자면, 내가 쿵쾅거리며 씩씩거리는 걸 자기가 닮아서 자기도 성질이 나면 그렇게 행동한다는 뜻이었다. 난 좀 어이가 없어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아니 그러니까, 앞차가 조금만 더 앞쪽으로 주차해 줬으면 좋았잖아. 뒤차 생각은 안 하냐고!"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납득시키려고 해명을 했다. 그랬더니 아들 하는 말."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구." 이런다. 자신이 판단할 바는 아니라는 뜻이다.
난 아들 앞에서 성질낸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기분을 가라앉히고 싶어서, 빌린 책 얘기를 했다. "근데, 빌린 책이 너무 낡아서 네가 읽다가 더 망가지겠는데, 어떡하지, 책 커버라도 씌워야 하나? 옛날에 엄마는 책 아끼려고 달력종이를 씌워서 읽기도 하고 그랬는데, 책 뭐로 한번 씌워줄까?"
집에 왔을 때는 스트레스받았던 일이 다시 생각나 냉장고에서 차가운 사과즙 하나 꺼내어 홀짝홀짝 마시고, 그러면서 남편에게 잠시 하소연을 했다. 혹시 차에 생채기나 내지 않았는지 경계의 눈빛을 하는 남편에게.
따지고 보면 내 차 앞에 주차한 차 주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가 필요한 대로 자기 차가 나가기 쉽게 주차를 한 것뿐이다. 뒤차를 생각해서 어느 정도 띄어서 주차할 만한 배려를 안 가졌다고 '너 왜 그랬어?' 하고 항의할 상대는 아닌 셈이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주차하고 말았을지도 모르니까. 다만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스트레스받고 애써야 했던 나의 곤경에 화가 나서 그 화살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었던 것뿐이다.
주차 스트레스에 대한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야 했다. 괜히 내 정신건강만 나빠질 테니. 마침 빌린 책은 읽기 위해 조치가 필요한 상태였고 난 그것에 마음을 쓰기로 했다.
오늘 빌린 <드래곤 라자> 6권은 정말 많이 낡아서 그냥 보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두꺼운 책 표지에서 가루가 날릴 것 같은, 폐기하고 다시 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었다. 책 커버를 씌워주고 싶어서 마땅한 종이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올해의 달력 종이는 이미 버려버렸고, 새 달력의 첫 장은 1월로 돼 있어서 뜯을 종이가 없었다. 이사 준비 때문에 대부분의 큰 종이들은 이미 처분한 뒤였다. 나는 고심하며 두리번거리다가, 아이스크림을 배달받았던 종이가방에 눈길이 갔다. 핑크색에 캐릭터가 예쁜, 도톰한 종이가 왠지 책 포장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끈을 떼어내고 접합된 부위들을 뜯어서 펴니 길쭉하고 튼튼한 종이가 되었다. 지저분한 곳을 잘라내고 책을 씌워서 매직테이프로 고정시켰다. 제법 그럴듯한 북커버가 되었다. 나름 만족스러웠다. 난 뿌듯한 마음을 느끼며 아들에게 갖다주고 열심히 읽으라고, 두 주 안에 읽고 반납해야 한다고 말했다.
어렸을 적에는 달력 종이로 교과서도 포장해서 썼던 적이 있었다. 책장에 있는 책들 중 몇 권은 아직도 내가 오래전에 포장했던 채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표지가 너무 얇은 경우 아껴 읽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요즘은 비닐이나 가죽으로 된 북커버도 나온다. 책을 끼워서 읽고, 다른 책을 다시 끼워서 읽을 수 있다.
낡은 책으로 인해서 그 옛날 책을 씌워서 사용했던 추억을 되새겨 보았다. 책 표지를 씌우는 일은 나름 힐링이 되어 오늘 겪었던 주차 스트레스를 거의 잊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