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어둠

안개에 점령당한 어느 날 아침에 쓰다

by 구판

하얀 어둠



아침이 나를 깨웠다

창밖을 보았다

바깥세상은 하양으로 가득 차

먼 산은커녕, 지척에 있는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물러간 자리에 어둠이 와 있었다

하얀 어둠


곧 걷힐 거야 전에도 그랬는 걸


태양이 떠오르면 백색으로 위장한 어둠은

조금씩 사라져 갈 것이다

낮의 주인인 태양이 있지 않은가

어둠이 낮을 지배하는 건 반칙이다


하지만

필연적인 외출 시간에도 태양은 보이지 않았고

세상을 숨긴 대기는 그 자리에서

미동도 안 하는 듯 보였다

자동차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도대체 태양은 어디 있는가

할 일을 안 하고선


우회전, 좌회전, 좌회전, 우회전

그리고 좌회전을 기다리는 사이

드디어 발견한 태양은

하얀 어둠의 기세에 눌린 듯

구름 낀 밤하늘에 걸린 보름달 같은 모습으로

겸연쩍게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아, 해님이 달님이 되었네!


상관없었다

은빛 태양이라도

하얀 어둠이 그 앞에서

부지불식간에 종적을 감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난 내 길을 가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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