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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판 Oct 18. 2022

지나치게 수수한 사람 여자인 나

남편에게 머리를 맡기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지나치게 수수하다. 다만 그 수수한 생활이 딱히 불편하지가 않아서 고수하고 있다. 꾸미고 가야 하는 직장이나 어려운 자리도 요즘은 거의 없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야, 아들 학교 라이딩하느라고 외출, 산책 삼아 외출, 그밖에는 주로 집 안에서 최소한의 살림과 책 읽기, 글쓰기, 그림 그리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화장할 일도 없고, 옷을 단정하게 입을 일도 없고.

그러고 산다.


꾸미지 않아서 제일 신경 쓰이는 대상은 굳이 뽑자면 남편인데, 남편도 드러내기는 딱히 내가 꾸미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이 없다.


언젠가 언니가 "너도 화장 좀 하고 머리 파마도 좀 하고 해라. 여자도 꾸며야 남편이 더 좋아한다." 라면서 내가 외모에 좀 더 신경 쓰기를 조언했다. 뒤로 묶는 머리를 이제는 짧게 잘라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생각해본다고 했다.  그다음 날인가 남편에게 머리 자를까? 하고 물어보니 남편은 자르지 말라고 한다. 긴 머리가 더 좋다고. 그래 봤자 썩 매끄러워 보이지도 않는 머리인데 긴 머리 여자가 더 좋은가보다.^^

그래서 긴 머리를 짧게 자르지는 않기로 결론을 냈다.


내가 긴 머리를 고수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짧은 머리는 조금 길어지기 시작하면 지저분한 것이 그대로 드러나고, 관리를 안 하면 영 보기가 싫기 때문이다. 미장원에도 자주 가야 한다. 긴 머리는 묶으면 그만이다.  묶을 수 있다는 것이 긴 머리의 가장 큰 장점이다.


요즈음은 한 술 더 떠서 미장원에 가는 것이 귀찮고 불편해졌다. 염색도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15분에 완성되는 크림 염색을 하고 있다. 그게 시간도 절약되고, 두피 건강에도 더 좋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장원을 안 가니 머리 자르는 것이 문제인데, 앞머리는 대충 내가 잘라도 되었다. 뒷머리가 문제였다. 혼자 자르기가 쉽지 않았다. 유튜브 영상 등을 참고하여 몇 번 시도해봤는데 썩 만족스럽지가 않게 결과가 나왔다. 그래도 일단 묶으면 버틸만하니 그냥 지냈다. 다음번에는 남편에게 부탁해보기로 했다. 언젠가 남편에게 뒷머리 잘라줄 수 있어? 했더니 그래! 하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젠 정말 뒷머리를 잘라야겠다고 작정한 날 남편에게 무작정 요구했다. 커다란 비닐봉지를 받치고 오래전에 사놓았던 머리 자르기용 가위와 다듬기용 가위를 가져다주며 일자로 자르고 다듬기용 가위로 삭둑삭둑 해달라고 했다. 남편은 어느 정도 잘라줄까를 먼저 물어본 다음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잘랐다. 빗으로 빗어내리며 자르지 않아서 뭔가 좀 비뚤비뚤하게 자르는 것 같았다. 미장원에서처럼 물기를 좀 묻혀서 흘러내리게 한 다음에 자르게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남편은 어렵지 않게 뒷머리를 가지런히 잘라줬고 나는 뭔가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의 머리를 감겨주는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미장원 가라고 안 하고 직접 잘라주는 남편의 자상함(?)이 조금은 크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내 머리도 잘라줄래? 하며 자기 머리를 나한테 맡길까 하던 남편은 그냥 미장원에 가겠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남편 머리 자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뒷머리는 대충 잘라도 묶으면 그만이지만, 잘못 자른 짧은 머리는 눈에 띄게 보기 싫다.


남편이 머리를 잘라주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오순도순 의지하며 늙어가는 느낌이랄까?


당분간은 이 머리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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