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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Jun 28. 2023

영화가 되지 못한/못할 소설

J.D 샐린저의 결정이 옳았던 듯_호밀밭의 파수꾼


THE CATCHER IN THE RYE(Little Brown & Company)/호밀밭의 파수꾼(민음사)_출처 yes24

점선면(이하 점): 1951년 발표된 소설인데, 자네는 언제쯤 이걸 읽은 거야?


이李씨(이하 이): 2021년 3월이었지. 소설발표되고 (계산기 좀...) 70년 만이네. 후~.


 요즘도 이 책이 많이 읽히나 싶어서 브런치스토리에서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검색해 봤더니 많은 작가님들이 꾸준히 이 책에 대한 글을 써오셨더라고.


오늘날 나도 거기에 한 명 추가요!


: 70년 된 책인데 고전의 반열에 오르다니, 작가로서는 영광이겠네.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도 많았을 것 같은데, 어째서 영화가 되지 못할, 못한 소설이라고 제목을 달았어?


: 일단, 작가가 영화화되는 것을 거절했으니까 못했다고 한 거고, 이 소설의 내용상 영화로 만들면 웬만해서는 걸작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느낌적 느낌 때문에.


작가의 반대는 이럴거라 추측해.

소설속에서 홀든의 형이 헐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라는 설정인데, 자본주의 영화산업에 노예가 된것처럼 홀든이 얘기하거든. 그러니 영화화 되는데 작가의 반감이 깔려있었던것 같고.


나의 개인적 느낌의 근거는 다음과 같아.

다니던 명문 사립고에서 퇴학 통지받은 후 2박 3일간 뉴욕을 헤매는 '불안정한 감정상태의 청소년' 홀든의 정신세계가 소설의 핵심인데, 그의 행동과 분위기는 영상으로 담아낼 수 있어도, 그의 의식세계를 시각화하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서.


소설에 기술된 홀든의 정신상태, 감정상태, 고민들을 빼고, 그의 행동만 보게 되면 불편하고 난해할 거야.


2021년 이전에 몇 번 읽기를 시도했었는데, 그때는 번역본이어서 그랬는지, 내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더라고. 그의 일탈에 대한 공감이 되지 않고, 그의 행동들이 불편했어. 정말로.


: 이 씨가 그랬다는데, 이 소설이 미국청년들에게 찬사를 받은 이유는 뭐야? 그 시절에 대학생들은 이 책 한 권씩 다 들고 다녔다던데.


: 시대를 생각해야지. 1951년이야. 우리나라에서는 6.25 전쟁이 한창인 때였는데, 미국 청년들은 진지한 엄숙주의에 대한 반감이 있었나 봐.


어른들의 위선에 대한 뼈 때리는 지적들이 소설 곳곳에 뾰족하게 솟아 있지. 소설 속 주인공 홀든이 보여주는 '불량함', '삐딱함', '마음대로', '일탈', '방황' 이런 생각과 행동들이 독자들에게는 대리만족이었는지도.


한때는 이 책이 '금서'딱지를 받았다는 게 재밌지. 오늘날 문화적 가치로 보자면, '순한 맛'인데.


: 2021년의 독자로서 읽으면서 어땠어? 순한 맛이어서 좀 김 빠진 맛이었을까?


: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어보려 했던  책 표지가 아래 모양이였어. 대학교 2학년쯤이던가. 그림만 보고 명랑, 포근, 귀염, 동심, 이런 느낌을 기대하고 있다가 내용을 접하니, 그 괴리감 때문에도 진도가 안 나갔지.

그리고 '얘는 왜 이런 거야?' 하고  그의 방황에 대한 당위성이 납득이 안 가는 거야.(나는 T형인간).

집도 좋고, 학교도 가족도 좋은데, 뭐가 그리 문제니? 이런 생각을 했더랬지. 결국 끝까지 읽지 못했어.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읽으니, 이제는 어린 날의 방황하는 여린 영혼?으로 보이더라는 것이지.


딴에는 인생의 깊은 고민에 방황하는데, 그래 그럴 때야,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한 번쯤 그래보고 싶은 때가 있는 거야, 어른들의 세계에 굴복하지 않고, 그 틀을 벗어나서 주체적으로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


금지된 것들을 욕심 내보고, 실행해 보고, 그러다가 깜짝 놀라서 제 풀에 돌아서 후회하기도 하고, 좌충우돌하면서, 자기의 순수함에 빗대어 세상의 혼탁함을 지적질해보고 싶기도 하고, 자신 역시 세상의 기준에 언젠가는 합류해 들어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그러기 싫다는 저항의 몸짓도 해보고 싶고, 아직은 마냥 동심의 순수한 아이들을 보면 어느새 이미 순수함을 잃은 자신을 혐오하기도 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이상과 철학에 한참 못 미치는 속물들의 대화와 소비에 코웃음을 치며 비웃어주고 싶고.... 홀든도 아마 자신의 정신과 감정상태 때문에 혼란스러웠을 거야.


그 혼란의 상태를 작가는 잘 표현해 주었기 때문에,  홀든이 그때 청순들의 표상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


딱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느낌이었지 않았을까.


: 이 씨가 보는 홀든의 특이점은 뭐야? 이 방황의 시작은?


: 홀든은 꽤나 깊이 있게 책을 읽는 인물이야. 그리고 그는 사람들을 관찰하지. 아마 그의 독서와 인간관찰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인간성의 비루한 측면들에 촉이 발달한 것 같아.


그러면서도 부자연스러운 만남을 즉흥적으로 만들려고 하고, 그들에게서 위로받으려고 하지. 참 모순적이야.


어린 나이지만 어른인 척 행세하면서 결혼을 제안하고, 매춘을 하려 들고, 술을 마시고. 순수를 동경하면서도 하는 행동은 어른 흉내야.


: 어떻게 사람이 늘 논리 정연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겠어?


:그러니까, 온갖 일탈을 어어가던 홀든이 마지막 부분에 자기는 동심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고, 학교 벽에 쓰여있는 욕설을 지우고 있으니, 그의 행동이 부조화스러우면서도 서글프게도 느껴지지.


어쩌면 이미 자신이 위선적이고 불순한 세계에 들어서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지도.


홀든이 호밀밭에서 노는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은 건, 홀든이 그런 존재를 원했기 때문일 거야.  하지만 그의 형도, 부모님도 그렇게 해 주지 못했지.


: 그럼, 맺음말로 홀든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 부모님의 입장이나, 형의 입장에서? 아니면 선생님 입장에서?


: 그냥, 어른의 입장이라고 퉁치고 말해볼게.

형, 부모, 선생님은 각자 홀든을 이해하고 관계 맺는 방식이 다르니까.


홀든?

우리는 어린아이로만 머물러 살 수는 없기에, 네가 조금 더 좋은 어른이 되는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어.

네가 원하는 진실함을 너로부터 시작하기를.

네가 싫어하는 타락에 대해서는 단호히 싫다고 거부하기를.

위선적인 권위에는 비굴하게 굴복하지 않되, 스스로 너를 지키기를.

헛된 사랑에 위로받으려고 애쓰지 말기를.

너에게 사랑을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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