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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Nov 15. 2023

불편한 이상理想

기억 전달자 The Giver

이李씨(이하 이): 이제 때가 되었네. '시티 오브 엠버 The City of Ember' 책 리뷰를 쓰면서 이 책을 언급했었지. 청소년 SF 소설에서 시간이 지나면서 디스토피아소설의 고전으로 격상 중인 이 책, '기억 전달자 The Giver.'


일정기간 공교육이 끝나면 아이들이 성인의례처럼 공동체성원들이 다 같이 모인자리에서 직업을 부여받는다는 점은 두 소설이 동일한데, '기억 전달자'에서는 직업이 배정되고 나서 배정받은 직업의 실습교육이 함께 이뤄진다는 점이 조금 달라.


주인공 조쉬Jonas는 '기억 보유자 The receiver'라는 역할을 부여받고, 기존의 기억보유자는 이제 '기억 전달자 The Giver'가 되어서 둘은 일종의 업무 인수인계 시간을 주기적으로 갖게 돼.


점선면(이하 점): 그 역할에는 뭔가 특별함이 있을 것 같네. 일단 책의 제목이고,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일이며, 주인공이 부여받은 임무라는 점에서. 조너스는 어떤 이유로 그 역할을 배정받게 되는 건지?


: 그게, 소설을 읽는다는 최고의 매력을 선사해 준 포인트인데, 조너스에게는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비범한 능력이 있었어. 성인식 이전 어느 평범한 날인데, 날아오는 사과를 쳐다보는 중에 사과가 이상하게 변하는 거야. 이 그 이상함.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변화. 순간적으로 일어났던 일인데, 조너스는 영문을 모르겠고, 누구에게도 뭐라 표현할 수 없었어.


조너기억보유자의 역할을 부여받던 날, 청중 앞에 섰을 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 사람들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하는데...


조너는 이렇게, 평범한 사람들의 감각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것을 지각한 능력, 한마디로 '너머를 보는 look beyond' 능력이 있었던 거야. 그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기억 전달자를 만나 기억을 전달받은 후에야 깨닫게 돼. 조너스와 마찬가지로 독자도 책을 읽다가 '아!' 하는 순간을 맞는 거지.


아쉽게도 영화는 시각 매체이다 보니, '이게 뭘까?'라는 궁금증에 애태우는 과정이 생략되어 버리고 말아. 조너스가 속한 사회의 대전제가 드러나는 거라서, 여기서 사연을 풀어놓을 수가 없네. 흠흠...


: 이 씨가 이 소설이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 했는데, 직업이 배정되는 것 말고 어떤 사회이길래?


: 날씨가 변화가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해 보자. 매일 같이 기상정보를 확인하고, 그에 맞춰서 우산을 준비해야 할 때도 있고, 계절에 맞게 옷을 바꿔 입고, 번거롭잖아. 그래서 이 사회는 완벽한 기후통제로 늘 같은 기후조건을 만들어 버렸지. 이게 Sameness의 한 사례야. 더 나아가서는 인종, 성별, 직업의 차별도  없애고, 가족도 진짜 혈족이 아닌 사회에서 배정된 구성원으로 한가족을 이루고 살다가 노령이 되면 가족 단위에서 독립해서 혼자 생활하도록 했어.


Sameness, 과연 이것이 인간이 모여 사는 곳에서 가능한 일인가? 조건과 환경의 차이를 극도로 제한하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개별적인 인간 존재와 만물은 시간 속에서 만물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데, 이 Sameness가 어떻게 구현될 수가 있겠나. 인간이 조건과 환경을 조작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통제'일 수밖에.


통제의 정점은 공동체 성원의 감정과 기억.

단 한 사람, 기억 보유자만이 공동체의 대표 격으로 지나온 과거의 기억과 감정들을 알고 있지. 그 기억은 공동체 다른 일원 어느 누구와도 공유되지 않는, 공유해서는 안 되는 공동체의 기억이야. 즉, 사회는 구성원의 기억을 제로화 함으로써 감정을 제거하고, 추하고 고통스러운 인간사회의 감정과 갈등이 끼어들어올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지.


: 그럼, 조너스는 너무나 외롭고 고통스럽겠다. 행복하고 기쁜 감정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것도 외로운 것이지만, 고통스러운 기억과 감정을 혼자 짊어지기에는 너무 나이가 어리잖아. 12살이라니. 물론 그 전의 기억 보유자들, 전달자들도 그렇게 고립되고 힘겨운 삶을 살았을 것이고.


: 그래서, 조너스 이전에 기억을 받았던 한 소녀는 너무나 낯선 감정들을 다 감당할 수 없어서 스스로 임무해제(죽음)를 선택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조너스도 알게 되지.


영화에서는 나이 설정도 조금 바뀌어서 18세 정도로 막 청년기의 초입 같은 외모의 조너스라서 그나마 조금 낫다고 해야 할까? 만 12세와 18세의 간극은... 중학교 1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의 차이. 이 몇 년간 아이들이 얼마나 폭풍성장을 하는지 거의 변태의 시간이라 할 수 있으니까. 소설 속 조너스보다는 더 강인한 면모가 느껴지지.


소설에서 조너스의 그냥 친구일 뿐인 존재들도 영화에서는 조너스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존재들로 비중이 더 커졌고. 뭔가 소설은 소년물인데, 영화는 청소년물이 된 것 같은 느낌.


: 조너스가 겪는 일들이 궁금해지는데, 이 씨가 꼭 집어서 말하고 싶은 부분 있다면 몇 가지만 살짝 공개부탁해.


: '멋진 신세계 The Brave World'와 극단적으로 비교되는 다른 점. 그 세계는 엄격한 계급사회로 배양액에서 성장하는 시기부터 계급에 따른 차별이 존재해. 여기는 모든 이들이 기본적으로 어떤 직업에 있던지 직업으로 인한 차별은 통제되고 있기에 계급 간의 서열은 존재하지 않으며, 복장도 계급적인 차별이 존재하지 못하도록 통일된다는 것.


덧붙여 '멋진 신세계'는 감각 충만의 세계였는데, 여기는 감각이 통제된다는 점.

멋진 신세계는 얼마나 감각에 진심인지, '촉감 영화'라는 게 있을 정도였고, 성욕구는 '모두는 모두에게 소유된다'는 기치 아래, 추구되어야 할 감각이었지. 조너스가 속한 이 사회는 기억과 함께, 모든 인간적인 감정과 감각마저 통제되어서, 조너스가 비록 친부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한 부모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그게 부모에게 제대로 들려질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지.


이 사회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아. 조너스는 기억전달자와 만날 수록 이 공동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감추고 있는지, 자연스럽지 못한 지를 배워가면서 의심이 쌓여가지. 그러다 대오각성의 순간이 오는데, 순간의 보육사인 자신의 아버지가 신생아게 임무해제(독극물을 주입해서 살해)를 그저 밥을 먹듯,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시행하는 것을 보는 순간이었지. 임무해제의 순간은 이 세상 너머의 세계로 가는 통과의식이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른 채 살아가. 임무해제 이후, 그 존재는 사라지지만, 그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하지.


그리하여, 조너스가 목숨을 건 도전을 감행하지. 그 도전을 성공하면, 이 공동체의 사람들에게 기억 보유자만이 가지고 있던 인간의 모든 기억과 감정들이 되돌아올 수 있기에. 그리고 또 하나, 조너스가 아끼는 또 하나의 생명을 공동체에 빼앗길 수 없기에, 조너스는 그 누구도 가보지 않았던 길을 나서.


: 결과는? 도전이니까 성공 아니면 실패 둘 중의 하나일 텐데.

: 교사 연수 때 '스타걸' 다음으로 이 책을 읽고, 마지막 부분이 조너스의 생존이냐 죽음이냐로 의견이 팽팽히 맞섰지. 영화로는 이 느낌이 안 나지만, 책으로는 모호한 분위기여서.


리딩 수업 지도하는 강사님이 우리의 토론을 보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You guys are so wonderful!'이라며 관전평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얄미운 스포일을 하자면, 조너스의 생존여부는 작가의 연작을 통해서 나중에 언급되더라고. 정답이 있긴 있었어.


: 이 씨의 책 소개를 들으니, 다양한 관점과 생각할 거리들이 있겠네.


: 그렇지.

임무해제는 개인과 공공의 선인가 Vs 임무해제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악인가

기억은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좋은가 VS 기억의 독점은 옳지 않은가

(혼자 기억을 가지게 된 조너스의 입장을 원하는가?)

통제로 인해 가난, 차별, 혐오가 없는 평화상태가 좋은가 Vs 가난, 혐오, 차별이 존재하지만 개인의 자유가 있는 사회가 좋은가

지금 우리는 어느 만큼의 통제에 길들여져 있는 건가.

하...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

쓰다 보니 지쳐서, 나도 지도강사님처럼 즐겁게 관. 전. 만 하고 싶어 지는구나.















'시티 오브 엠버 The City of Ember' 책 리뷰를 쓰면서 이 책을 언급했었지. 이제 때가 된 거 같아. 교사연수 때 '스타걸 stargirl' 다음이자 마지막 읽기 교재였던 이 책. 마지막 수업시간에 모호한 결말을 두고 주인공 조쉬 Josh가 살아남았다, 아니다, Josh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환상을 보는 거다 라는 두 의견이 팽팽이 맞서서 한참의 공방이 있었어. 지도교수님이 고개를 내저으며


나는 마지막 부분을 조쉬가 추위와 허기에 고통 받으면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는 것이라 생각했었어. 나중에, 이 책이 시리즈의 첫 작품이고 속편에서 조쉬는 생존하여, 다른 사회에서 성인이 되었다는 걸 알게되고, 실망이 무척 컸지. 조쉬가 살아남아서 실망했다는 게 아니라, 나의 추측이 빗가나서...


점선면(이하 점): 아무리 마음가는대로 쓰는 리뷰지만, 소설의 끝을 말하다니!


이:



허기와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왜 조쉬는 스스로 자진해서 추위와 배고픔이라는 신체적인 위협과 추격과 체포에 대한 공포라는 정신적인 고통의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는가. 마치 '멋진 신세계'에서 야만인 존이 스스로 고통받을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그는 주어진 질서와 평화에 만족하지 못하는지!


자, 그들을 대오 각성시키는 순간이 있게 마련인데, 조쉬의 경우는 아슬아슬한 빌드업이 계속되다가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12살이 되면, 이 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이 다 함께 모여 일종의 성인식을 거행하는데, 거기서 각자 사회에서 맡을 일이 배정,발표돼. 이때 조쉬는 기억보유자 The Reciever의 역할을 맡게 되지. 자연스럽게 그 전까지 보유자였던 자는 기억전달자 The Giver가 되는 거고. 일종의 직업훈련으로 조쉬는 기억 전달자와 만남을 가지면서 조금씩 기억을 전달받아.

점: 이씨가  말한 빌드업과 순간의 붕괴에 대해서 말해주라.

이: 너무나 당연했던 일상에 대한 의심이 시작되는 것이지. 기억 전달자와 만남을 가질 수록,

이정도까지만 해도, 이 소설이 그려낸 가상의 공동체가 평안과 질서를 가장한채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정서와 욕구마저 통제하려는 무시무시한 얼굴을 감추고 있다는게 조금 느껴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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