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李씨(이하 이): 노매드랜드 Nomadland에 이어 소설, 분노의 포도 The Grapes of Wrath를 소개할게.
헤아려보니 이 책을 읽은 지가 30여 년.
노매드랜드 리뷰를 쓰고 바로 쓰려고 보니, 대학시절 처음 책을 읽고 받은 충격과 큰 줄거리들만 기억이 나서 그걸로는 안 되겠다 싶더라.
다시 제대로 읽어야겠더라고.
점선면(이하 점): 저 긴 이야기에 담긴 에피소드들이 한둘이 아니겠어! 위키디피아에서 볼 수 있는 줄거리 이런 거 말고, 이 씨의 독후감을 들려줘봐. 젊은 날의 감상과 지금의 감상. 이렇게 나눠볼까?
이: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해서 대학을 다니던 나. 고등학교 때도 농사짓는 부모님과 떨어져서 자취를 했었고. 늘 우리 집은 부자가 아니라 생각했지. 부모님의 농사일은 일중에서도 고된 일이라고 생각했고, 화이트칼라 직종의 부모님을 둔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어.
그러다,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어.
아! 나는, 나는 함부로 '결핍'을 말하면 안 된다.라는 걸.
물론, 전후우리나라 압축성장기에 일어났던 일들을 배우게 된 것도 영향이 있었지.
적.어.도. 우리 부모님은 땅을 가졌어. 우리의 이웃들도 그랬어.
땅을 빼앗긴다는 것에 대한 공포, 집을 내쫓겨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공포,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일자리가 없어서, 굶주림에 허덕이며 느끼는 두려움은 없었던 거야.
작은 촌락을 이뤄서 멀고 가까운데 밭을 두고 모여 살면서, 수도도 전기도, TV도, 무슨 가전제품들도 다른 곳보다는 한참 늦게서야 접하게 되었어도, 적어도 '대지주'의 횡포라는 것은 없었으니까.
소설의 배경, 1930년대 미국의 동부, 소작인들은 정직한 땀방울로 자기 땅을 일구고 살아가지만, 소출은 적고 기후는 나쁘고 수확인 적을 때는 은행에 빚을 지게 되지. 결국, 빚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은행이 땅의 소유권을 빼앗아 가는 거야.
그게, 소설의 주인공 가정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어. 미국 동부, 남부,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집과 땅을 잃고 쫓겨나. 그리고 일자리를 찾아서, 미지의 땅 서부 캘리포니아로 대장정의 행진을 시작하지. 그 모든 과정에 녹아있는 결핍, 가난.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과정에서도 잃지 않으려 했던 가족이라는 가치가 무너져가고, 캘리포니아에서 당하는 불의, 홀대, 비참함.
나는 모르던 세계였지. 특히나 미국이라면, 아메리칸드림의 나라가 아닌가.
가능성의 나라라고 위상을 드높았던 그 나라의 과거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누군가 그런 일을 실제로 겪었야 했다는 것이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았어.
지난 며칠 동안 이 책을 볼 때는, 작가의 머리 속을 생각 해봤어. 그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그리고 내 나름대로의 한 주제를 선택한 게, 오늘의 제목이야.
맘몬(물신)이 어떻게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지 작가가 보여줘.
인간이 고안한 구조, '은행'이 어느 순간 인간을 지배해.
은행에 땅을 빼앗겼을 때, 그리고 은행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실제의 사람들을 만났어도, 결국은 자본과 탐욕이라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적수이기에 눈을 부라리고 손을 휘둘러 싸워볼 수 도 없었어.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사람들을 땅에서 내쫓고도 아무 수치심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넓어져가는 땅을 바라보며 만족하는 물신의 지배.
이주민이 정착한 땅, 캘리포니아는 어떤가.
여기는 대지주가 땅을 독식하지. 심지어는 작은 농장들도 먹어 들어가면서, 점점 소수의 사람들이 땅을 지배해. 땅을 사랑하지도, 땅의 식물에게 발길 한번 주지 않는 자들이 왜 그렇게 많은 땅이 필요하지?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가진 자들은, 이주민의 곤란한 상황을 이용만 할 뿐이야. 당장 한 끼의 식사거리도 장만 못한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임금에도 서로 경쟁하듯이 몰려들도록.
물신에게 경배하며 괴물이 되어가는 인간들이 있어.
그 괴물의 날카로운 손끝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이주민의 삶은 정말 비참해.
하지만, 작가는 괴롭힘 속에서도 인간됨을 잃지 않을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하나는, 연대.
소설은 파업과 파업의 실패만 나오지만, 그래도 연대의 필요성에 대해서 작가가 계속 말해.
또 하나는, 인간적인 긍휼과 나눔을 잃지 않는 것.
서부로 가는 여정에서 하룻밤의 공동체를 이뤘다가 헤어지더라도, 후버빌의 천막촌에서 잠시 머물러있더라도, 국영 야영촌에도, 그리고 인상적인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점: 노매드랜드를 읽었으니까, 어때, 2008년도의 금융위기와 1930년대 소설의 상황이?
이: 여러 가지 감상이 떠오르는데....
생각나는 대로 적어볼게.
미국은 정말 땅이 넓은 나라구나. 일자리를 구하려고 몇 주(week)을 운전해서 가기도 하니 말이지.
한시적 일자리의 노동력은 이렇게 충당이 되는구나. 캘리포니아 과일 수확철에 몰려든 일꾼들처럼 지금도 과일과 야채의 수확철, 아마존의 크리스마스 시즌에 유동민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일자리를 찾고 있으니.
소설에 나오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이주민들이 소설 이후의 미국 실제역사 속에서 어떻게 그곳에서 삶을 이어나갔을까?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수단화하는 노동고용의 관습이 그때 이후로 어려움 속에서도 나아져오고 있는 것이지! 케이시 목사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그리고 그로 인해서 각성하게 되는 소설의 주인공 톰 조드 같은 인물들이 있기에.
아! 케이시를 목사라고 하면 케이시가 인정하지 않을 텐데!
사람들은 그를 목사라고 불렀고, 그는 자신이 목사가 아니라고 했지.
책에 부록으로 붙은 해설서를 보니, 작가가 일부러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ist의 이니셜과 같이 되도록 짐 케이시라 명명한 게 아닌가 추측된다고 했더군.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그럴만하다 생각했네.
그는 힘없이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영향력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닐 테니까.
자, 이제 나의 지극히 사적인 감상평을 마칠까 해.
다음은 오늘 소설 작가 존 스타인벡의 다른 소설을 얘기해 볼게. 책은 2년 전에 읽었고, 영화는 두 달 전쯤 봤으니까, 곧 쓸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