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캐나다 어학연수를 가서, 캐나다 서쪽 작은 도시에서 지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누군가의 초대로 중년부부의 집에 갔는데, 그곳 안주인과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뭔가를 빨리 이해하지 못했는지, 어땠는지 적시에 바로 답을 못하고 잠시 주춤거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캐나다 중년 부인의 표정과 몸동작.
우리말로 하자면, '아, 됐고!' 정도쯤 될까요
'내가 하는 말을 네가 이해를 못 했던지, 답을 모르던지 간에, 이제 너한테 귀 기울여 들을 필요가 없겠다!'라고 그의 비언어적인 표정과 몸짓의 의미를 전달받았습니다.
이렇게 오래된 일인데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아마 내가 그때까지는 그런 경험을 그다지 해보지 못한 행복한 삶을 살아서였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아주아주 뒤늦게 찾아왔습니다.
'말'에 대한, '대화'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말이죠.
조금 더 여유 있게, 호기심을 가지고 나를 기다려줬다면 나는 무엇이든 얘기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아무 흔적도 없이 평범한 순간으로 흘러가 기억에 남지 못했겠죠.
뭔가 할 말이 있었는데, 들려질 기회를 놓쳐버린, 기회를 박탈당한 말들이 있습니다.
그 말이 중요할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만, 말의 중요도를 떠나서 내 말이 들려지지 못했다는 것이 때로는 수치로, 억울함으로, 낙담으로 남습니다. 말의 내용과 상관없이 그 순간이 새겨놓은 부정적인 감정이 있습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들려질(be heard) 가치가 없는 존재이구나....라는 느낌말입니다.
그러기에,
'삼켜진 말'에 대한 저의 첫 번째 깨달음은, 침묵 속에서 기다려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책 '교사역할훈련'에서 '침묵의 듣기'를 만나고 난 후, 이 기다림이 바로 상대방의 마음, 정신, 그리고 이제 겨우 혀끝에 도달한 언어가 음성으로 나타날 시간을 오롯이 들어주는 들어주는 대화의 시간이라는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이들이 채 자신의 생각과 정서와 마음을 살펴 답할 말을 구해보기도 전에, 충고하고 평가하고 비난하고 조언하고 명령하려 들었는지 절절한 반성에도 닿았습니다.
그 이후, 학생들과 상담을 하다가 혹은 상대와 예민하고 중요한 주제에 대한 아슬아슬한 의견대립이 있을 때, 이런 침묵의 시간이 찾아와도, 끝내 상대방이 뭐라도 얘기하도록 기다렸습니다.
실상,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간을 기다려, 생각할 시간을 주고, 네가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존중의 표현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혀끝까지 왔는데, 뱉어지지 못하고 들려지지 못한 채 '삼켜진 말'이 없도록 말입니다.
행여, 스스로 판단하여 내뱉지 않기로 결정하여 삼켜버린 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니까요. 그 부분까지도 존중되어야 합니다.
'삼켜진 말'에 대한 저의 두 번째 입장은 요즘 들어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거의 늘 청자의 입장에서 염두에 두었던 이 말을 화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른이 되었고, 선생님이 되었고, 선배가 되었습니다. 교회공동체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족, 확대가족에서나 어른, 선배님들이 계시긴 하지만, 원치 않게 점점 위치가 위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점점 더 말하는 게 부담스러워진답니다. 이 말에 동감하실 분 계실까요?
사회화 기술로 학습한 정도의 스몰토크만 사용하는 저는, 아직도 다수가 모인 모임에서 일정 주제 없는 대화의 시간을 즐기지 못합니다. 대부분 청자의 입장이다 보니, 자동적으로 화자를 관찰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 말들을 합니다. 저는 들은 말을 잘 기억하는 편이라 나중에는 그런 정보들을 가지고 상대방과 소소한 스몰토크의 주제로 잘 사용하기도 합니다.
대부분 청자의 입장이지만 대화에 참여하다 보면 뭔가를 말하게 되기도 하는데, 가끔 시간이 지나서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저도 잊은 말을, 상대방이 기억을 하고 있더라고요. 제가 사용하는 기술로 역공당하는 기분이 드는 거죠.
'내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내가?"
그런 순간을 경험하면, 내가 말하는 내용을 내가 기억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했다는 약간의 패배감 같은 씁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의 나와 일관성이 있는 말이라면 상관없지만, 어느 대목에서 즉흥적으로나 반어적으로 내뱉은 말이 '나'라는 사람과 연결되어 기억된다는 사실이 무척 불편하게 느껴지니까요.
나에 대한 정보가 오류가 생기게 될까 봐 말이 조심스러워지는 것도 있지만, 듣는 이의 입장을 생각하며 말을 '삼키게 되는' 때가 많아집니다. 내가 뱉은 말이 청자의 입장에서 들을 만한 것인가?를 생각하면요.
유익한가?
재미가 있나?
그가 요청한 것인가?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가?
하지만 사회생활을 해야 하니, 섬세한 관찰에 근거한 긍정적인 피드백이나 칭찬은 적재적소에, 감사의 표현은 작은것에도. 늦더라도 꼭, 언어적 유희는 언어유희로, 완전히 실없는 농담은 농담으로 구분해서 잘 사용해주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경직되니까요.
저같이 사회화된 INTJ의 언어생활은 상당히 구조적이고 계획적이라는 점, 같은 성향의 분들은 공감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못 견디니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따뜻한 말도 학습해 온 사람들일 겁니다.
이런 자기 검열이 느슨해지는 때가 남편. 자식과 함께할 때고 가족 중에 가장 말수 많은 역, 실없는 소리를 자처하는 탓에 이따금씩 지적을 받곤 합니다. 안 그러면 너무 조용한 집이라.
아직도 진정한 언어 고수의 길은 멀고 멀었네요. 흠.
오늘의 요약,
상대방의 말할 때는 '삼켜지는 말'이 없도록 침묵의 듣기로 존중의 표하라.
내가 말할 때는 지혜로운 말, 후회하지 않을 말을 가려하여, 불필요하고 부적절할 말은 잘 '삼키어' 버리라.
덧붙여,
외국어학습자로서 외국어습득은 평생에 걸친 lfie-long 과정이라 생각하지만,
어쩌면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말을 배운다는 것, 말의 훈련 역시 평생에 걸친 일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