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공식적인 사망시간은 6월 30일 23시 56분. 이 보다 십여분 먼저 오빠가 전화를 해서 어머니가 오늘 밤을 넘기시기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 이후 마음이 떨려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정쯤오빠의 전화를 다시 받았다.
'어머니가 가셨다.'
자식들 어느 누구도 곁에 두지 못하고 숨을 거두셨구나. 애달픈 생각에 눈물이 흘렀다.
6월 1일 선거일에 어머니를 본 게 마지막 대면이 되고 말았다. 요양병원으로 면회예약을 하면서 내 거짓말로 그쪽이 허락한 날보다 일주일을 앞당겼으니, 지레 어머니를 볼 수 있을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역시나!
하나님은 나의 이런 인간적인 시도를, 무효화하셨다. 그래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이른 아침의 제주공항,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렀다. 초여름의 훈기와 쨍한 햇빛 속에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뒤에 도착할 언니와 형부를 기다리면서.
크고 작은 사이즈의 여행가방을 맨 사람들, 혹은 여행자처럼 보이지 않는 일상의 차림을 한 사람들이 바삐 공항을 들고 났다.
저기요, 그거 알아요? 어제 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지금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가려는 참이에요.
어느 누구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저 내 맘속으로 해 본 소리여서 그렇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잠시 머물러 지나가지만, 타인이라는 존재는 참으로도 멀다. 저기 건너 벤치에 앉은 젊은 청년은 무슨 사연으로 혼자 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나요?
언니와 형부가 도착했는데, 아침을 먹고 출발하자고 한다.
산 자들의 본능이란! 배고픔을 느끼고, 그래서 먹어줘야 한다.
허기지면 안 되잖아. 우리가 오늘 긴 하루를 살아야 하는데.
그래! 살아야 하니까! 우리는 살아있는 사람들이야.
공항식당에서 야무지게 아침밥을 챙겨 먹는다.
살아서 걷고, 말하고, 전화받고, 전화하고, 밥을 먹고, 트림도 하고, 물도 마시고, 몸이 뻐근해서 목도 돌려보고, 어떻게 장례식장으로 갈 건지 궁리도 해본다.
장례식장에서 다시 합체한 삼 남매. 지금부터는 살아있는 자들의 불꽃 튀는 격전장이다. 이별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준비할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감정에 압도되지 않았고. 그랬기에 조금은 더 분별력이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렇지만. 오빠가 제주도에 귀향해서 얼마간 제주생활을 한 것이 도움인지 독인지, 결정을 할 때마다 뭔가 삐걱댄다. 아예 제주풍습을 모른 척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거다. 이제까지 살면서 주고받은 거, 앞으로 살면서 주고받을 걸 생각하니, '이건 안돼. 이건 해야 돼'가 생겨난 거다.
어머니가 기독교인인데, 제사상 과일이며 밥국을 올리지 말자고 했더니, 문상객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예를 다하고 싶은데, 그런 사람들 생각하면 제사상을 차려야 한다고 한다. 자, 이럴 땐 터전에 사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줘야지. 그래서 교회목사님의 조화와, 제사상이 함께 어우러진 혼합, 융합종교적인 장례상이 탄생되었다.
어머니는 말이 없고, 오빠는 말을 한다. 어머니는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오빠는 이 좁은 고향 공동체에서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이다. 자, 산 자의 승! 홈그라운드 선수의 승!
그래도, 어머니가 병상생활을 하는 동안, 오빠가 나름대로 준비해 둔 것들 덕분에, 언니와 내가 짐을 덜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머니 없는 시골집에서 오빠는 얼마나 많은 모의장례식을 머릿속으로 그려봤겠는가, 계획형 J의 동지애를 느낀다.
결정의 연속. 그러면서 알게 된다. 잠시잠깐 문상 가서 상주를 보고 오는 것은, 유족으로 겪는 시간의 흐름 중 얼마나 짧은 순간에 불과한 것인가. 유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열렬히 살아있다. 그들에게 피하기 어려운 임무, 고인을 잘 보내야 한다는 임무가 주어졌으니까. 그런데, 정작 우리가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그저 살아있는 자들의 의식(ritual)에 골몰해 있다.
제주도는 장례 첫날 문상객을 받지 않는다. 대신 발인 전날을 일 포 날이라 부르고 이 날만 문상객을 받는다. 어머니의 장례는 내일이 일포날이다. 제주도는 또 특이하게도 문상객에게 농협상품권을 답례로 주는 풍습(이라고 불러도 될까?)이 있다. 오빠는 이것을 마련하는 게 급선무여서 온통 여기다 신경이 갔다. 내일이면 휴일이라 안되니... 그럼 몇 장이나 필요할까... 누가 가서.... 어디로 가서 사야 하는데....
그러다 점심시간이 되자, 밥은 먹고 하자면서 장례식장 테이블에 모여 앉아 밥을 먹는다. 제주도 장례식장 주음식은 성게미역국이다. 오전에 움직이고 지쳤다, 성게미역군 한 사발 다 비우면서, 국이 맛있다고 생각했다. 제주도 성게미역국, 누구는 토속음식이라고 음식점에서 사 먹는 메뉴를 여기서 본토박이 조리법으로 먹고 있네, 생각도 곁들여서.
오후 네 시 어머니의 입관의식이 시작되었다. 입관예배드리며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았다. 입가에 핏딱지가 맺혀있고, 표정은 살짝 일그러져 있고 잠시잠깐 보이는 어머니의 사지를 보니, 어머니 가시는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웠을 생각과 어머니와 함께 했던 기억에 입관예배 내내 눈물이 났다.
입관예배는 언니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서울에서 내려와 인도하셨는데, 목사님은시골집으로 어머니를 찾아와 만나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미셀 오바마의 전기를 읽고 있다는 것과 목사님께 신학적인 질문을 하며 한 시간여를 보냈다는 사실을 언급하셨다.
옆에서 언니가 쿡. 웃음인 듯 한숨인 듯 한 소리를 냈다. 어머니는 참으로 시대를 잘못 타고 나신 것 같다. 좋은 시절에 훌륭한 교육을 받아 그 지적 호기심을 채울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머니는 시대를 탓한 적도 가족을 탓한 적도 없는데. 나는 정작 그 시대가 아쉽다.
그게 서러워 더 울었다. 이 모습이 딱하게 보였는지 입관이 끝나고 혼자 오도카니 앉아 있을 때 사모님이 내 앞에 앉아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엄마는 지금 좋은 곳에 계세요.'
그렇다. 이미 어머니의 영혼은 늙고 낡은 육신을 벗어나 천국에 있을 것을 믿기에, 더는 울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입관식에서 많이 울었다, 지칠 만큼 울었다.
군에서 휴가를 받아 나오는 아들과 함께 출발한다고 남편과 아이들은 입관예배에 늦어 나의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이들이 옆에 있었으면 그렇게 맘껏 울지 못했을 것 같다. 왜?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아, 내가 엄마니까. 내가 어른이니까...
어머니의 장례.
어머니는 유족들의 시선에 잠시 머물렀다가 관속으로 들어가 봉인되었다.
산 자들이여, 그대들은 아직도 뜨거운 피가 흐르기에, 먹고 배설하고, 잠에 몰려 깜빡 졸고,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높이며 이 장례의 퍼포먼스를 끝까지 잘해나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