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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점선면 May 09. 2023

장례_발인

남은 자들의 즐거운 애도

2022. 7.3.(일)


 초여름 쨍한 햇빛이 비추는 아침, 가족들을 실은 운구차가 장례식장을 출발했다. 화장터로 가는 길에, 차는 시골집 앞에서 멈추고, 영정 사진을 든 언니를 앞세우고 가족들이 줄을 지어 대문을 넘었다. 마당의 잔디는 이슬을 머금어 햇빛에 짜랑짜랑 빛나고 있었다. 오늘따라 모든 색채가 배나 선명해진 것 같이 보였다.


가족의 행렬 중에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도 있었다. 아들이 어렸을 때 남편의 장기 해외출장 때문에 이 집에 내려와 두 달간 어머니와 같이 지냈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업고 이집저집 마실도 다니셨다. 그때 이 시골 안방 모기장 안에서 첫걸음마를 디디고, 이 잔디마당에서 걸음을 연습했던 아기가 이제 군대 일병이니, 어떻게 어머니가 늙지 않았겠는가!


 어머니의 유골함은 아들에게 맡겨졌다. 화장터에서 가족묘지까지 이십여분, 아들은 어머니의 유골함을 조심스레 안고 있었다. 아버지 묘실 곁에 빈 묘실에 어머니의 유골함을 두고, 가족들이 한 삽씩 흙을 담았다.


어머니는 최연장자의 자격으로 2016년 가족묘지 이장작업을 진두지휘했다. 어머니 나이 86세였다. 조상님들 묘소를 옮겨 오는 것과 함께 장차 이곳에 묻힐 이들을 위해 빈 묘실도 마련해 두었다. 어머니 자신과 아들의 묘실까지 만들어 두었으니, 이장 작업을 마친 날, 어머니는 무척이나 흡족해하셨다.


'나, 이제 죽어도 갈 디를 마련허난 걱정이 어쪄(없다)'


글 쓰는 일 말고 어머니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신 일 중에 하나다.

2021년 10월 가족묘지에서, 어머니


대리석 석판으로 묘실을 막았다. 마지막 마무리 작업까지 다 끝나서 인부들이 철수하고, 장례일행이 나무그늘에 앉아 새참을 먹고 있는 사이, 나는 내 남편과 두 아이를 불렀다.


어머니의 묘실은 정강이 중간정도 높이의 직사각형이어서, 가족들이 둘러서서 손을 맞잡을 수가 있었다. 오늘, 이 장소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남편과 나, 일병인 아들, 고등학교 3학년인 딸. 손을 잡아 어머니 묘실 위에서 원을 만들어 섰다. 어머니로부터 내가 왔고, 나로부터 내 아들과 딸이 세상으로 나왔다.


핏줄이란 이렇게 이어져왔다.


아들을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의 손을 빌려 아들을 돌봤고, 둘째를 출산했을 때는 내가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아들을 돌보는 것부터,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어린 딸을 돌보는 데 어머니 신세를 졌었다. 어머니 손에 씻겨지고, 어머니 등에 업혔던 아이들이다.


내가 먼저, 그다음 남편이 기도했다. 어머니가 잘 살아내신 것과 덕분에 우리의 생명이 이어진 것을, 우리 가족이 어머니에게 받은 도움을, 명절 때마다 제주도에 와서 어머니와 보낸 시간과 추억들에 대해서 감사했다.


 내 자녀가 이 시간 내 곁에 있는 것이 정말 좋았다.




저녁 5시. 가까운 친족들과 옹포 바닷가 횟집에 모였다. 남편과 아이들은 딸의 학교일정 때문에 일찍 출발하고 없었다. 그래도 족히 이십여 명이 되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가족들이 어른들을 모시고 즐거운 가족모임을 하고 있나 보다 생각할 장면이었다.


술잔이 돌고, 맥주와 소주가 부어지고, 한 번은 오빠가, 한 번은 친척 고모가, 한 번은 작은 어머니가 건배제의를 했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고 웃음도 피어났다. 즐거운 날을 즐겁게 기념하는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아니면 제주도에서 이렇게 모일 수 없는 관계들이었는데, 어머니 덕분에 오늘 모였다.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가 이 모습을 보면 노여워하실까?


아니, 연약한 육신의 굴레를 벗어나 이제 진정한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된 것을 기뻐하는 축하로 여겨 주셨으면 좋겠다. 남은 자들은 이제 또 힘을 내어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라고 격려해 주는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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