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어머니의 글쓰기와 책 읽기를 무척 싫어하셨는데, 1998년 어머니가 문화방송 여성시대에 사연을 보내고 부상으로 이 서랍장이 집으로 도착하자,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셨고, 그 후로 어머니의 연이은 입상 소식을 들으며 어느새 어머니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그 서랍장 안에 담겨있던 어머니의 물건들을 꺼내고 정리하는 일이 어제 시작되었다. 삼 남매의 대화가 쏟아져 나온 어머니의 물건들 위로 바삐 오갔다. 물건의 쓸모에 대한 평가, 물건이 어떻게 어머니에게 왔는지 생각나는 추억 등 정신이 뻗어나가는 대로 대화도 뻗어나가며 바삐 오갔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물건을 분류를 하는 정신적인 노동이 묘한 몰입감과 성취감을 주었다.
고인의 유품을 정리하고 처분하는 일. 그리고 기관에 남은 어머니에 대한 기록들을 '사망자'의 것으로 요청하는 일로 삼 남매는 오늘까지 한림읍내, 제주 시내 이곳저곳을 한 묶음이 되어 돌아다녔다. 셋이 한 세트로 묶여 처리해야 할 일들이 꽤 되었다.
삼 남매에 형부까지 총 네 명이라서 모르는 사람은 두 쌍의 부부동반 모임이라고 봤을 수도 있다. 그런데 너무 삭막하지 않은가. 관공서만 드나들다가 끝내 버리기에는. 이리 좋은 계절에 제주도에 있는데!
수산 저수지로 갔다. 저수지 바로 옆에 아담한 둔덕 같은 봉우리, 수산봉이 있다. 수산봉을 조금 오르면 한라산 풍경을 마주한 나무그네가 나온다. 우리들은 돌아가면서 수산봉 나무 그네를 탔다. 그네를 밀어주면 마치 하늘을 날아서 저수지 건너 한라산에 닿을 기분이었다. 어두운 나무 그늘에 서서 바라보이는 한라산은 대낮의 빛 가운데 선명하게 반짝여서 한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을 줬다.
자, 잠시 멈춰 숨을 고르다가
이 어둠에 서 있다가 저 빛의 세계로 힘차게 날아 돌진하는 비이...해앵.....
이라고 하기에는 오가는 시간이 초라했지만,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몸 안의 피가 팽팽 돈다. 우오왁... 꺄아악...
내가 어찌나 심하게 소리 지르며 웃었던지 언니가 핀잔을 준다. 어머니 장례를 치른 딸 같지 않다는 거다.
에효. 이렇게나 크게 소리치고 웃으니 좋은데. 나는 이미 울만큼 울었다고요. 그래서 이제 비어진 마음은 웃음으로 채우고 싶어!
수산리 곰솔/ 그네 타면서 소리지르고 있는 중인 나
수산봉을 돌아 둘레길로 걸어 나오며 우리가 언제 이렇게 다정하고 즐겁게 함께 웃었나 싶게,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서로를 치하하고 있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서로를 높여, 칭찬을 늘어놓아 봤던가.
언니가 언제 한번 갔다가 재료 소진으로 먹어보지 못하고 되돌아왔다는 교래리의 한 횟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언니는 헛발걸음을 했던 아쉬운 기억이 보상받는 기분이라 했고, 다른 이들은 언니의 실패담까지 양념으로 얹어 먹는 기분이라 은근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교래리 방파제 걸으며, 석양 감상하기.
우리 남매의 치유, 9할은 제주도의 산, 바다, 하늘, 바람 덕분이었다. 감사하게도 그런 치유의 날씨를 선물로 받았다. (제주도의 날씨가 험악할 때는 어떻게 되는지, 경험해 보신 분들은 이 말의 뜻을 아실 듯.)
오전에는 산소에 갔다. 묘지 안장 이후 두 밤 사이에 무슨 큰일이 있을까 싶을까만, 이후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테니, 그전에 자식들만 조용히 묘지를 보고 오자는 누군가에 의견대로, 넷이 함께 갔다.
차로 움직여 집에서 십여분 거리. 황량해보이는 밭 가운데 있는 묘지. 집으로 오면서 생각했다. 왜 한평생 살아온 집 옆에 우영팟(텃밭)을 두고 저기 외딴 벌판에 가족을 묻나?
갑자기 떠오른 이 생각의 끝은, '내가 죽고 남은 잔해가 가족들에게 들려진다면. 그걸 우리 집 우영팟 양지바른 곳에 묻어달라하고 싶다'로 끝이 났다.
묘비도 필요 없고, 뭣도 필요 없다. 작은 종이봉지에 담겨서 흙에 묻히고, 그냥 흙으로 섞여 들어가고 싶다. 다만 그곳이 내가 남모르게 오줌도 싸고, 숨바꼭질하느라 숨어들던 우영팟 구석이었으면 좋겠다.
영혼이떠나고 남은내 육신에 대한 미련은 없을지언정, 왠지 모르게 그렇게라도 내가 생겨난 거대한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되, 내 어린 시절내 발이 닿던 땅 속에 녹아들고 싶은 마음인 거다.
오후에 시내에서 일을 마치고 오면서 이번에는 고내봉을 올랐다. 부족한 정보 때문에 즐거운 산행이었다기보다는 더운 여름 땀을 비 오듯 쏟은 강행군이 되긴 했지만, 이것도 추억이라며 깔깔댔다. 삼 남매에게 이런 긍정성을 불러일으키다니, 지난 4개월의 시간이 우리를 많이 달라지게 했구나!
교내봉 정상에서 보이는 바다
어머니 간병 물품 사러 갔던 애월 상품점에 갔다. 그때와 지금, 그 사이 우리의 감정은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던가. 그러나 오늘의 쇼핑은 조금 즐겁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부전문점 식당에서 저녁도 먹고, 해지는 곽지 해수욕장에 들렸다. 바닷바람과 파도소리, 바다를 붉게 물들인 석양 빛에 감사와 행복감이밀려왔다.
시골집이라 한낮의 열기로 집 안은 찜통처럼 데워져 있었다. 에어컨을 켜고 잠이 들었는데, 한 밤중에 열기에 뒤척이다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에어컨이 꺼져있었다. 대신 마당을 채운 밤의 공기는 서늘해져 있었다. 집에 창문을 다 열어 놓고 마당 한 귀퉁이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어, 사위가 점차 분명 해지는 시간 동안, 정신도 또렸해졌다.
어머니의 가정간호는 여름이 시작되면서 어려워졌을 것이다. 에어컨이 있어도 연식이 오래된 이 시골집에서는 제주도의 여름을 감당하기에는역부족일 테니까. 어느 시점에서든 어머니는 먼저 이 집에서 다른 곳으로 떠나셔야만 했을 것이다.
한 때는 모여 살던 이 집에서 아버지가 먼저 가셨고, 어머니가 떠나셨다. 이제 삼 남매가 남았다. 그리고 언니와 나는 각자의 집으로 내일 떠난다.
어머니의 간병기간 4개월 동안, 삼 남매는 지난 50여 년 총합보다 더 치열하게 대화했고, 서로 부대꼈고, 감정의 바닥을 서로에게 드러냈고, 서로 날을 세우기도 했고, 위로했고, 격려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가셨으면 경험하지 못할 애증의 시간을 지났다. 한 뼘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두 뼘?측량은 할 수 없으나, 어제오늘 우리가 보낸 시간을 보면, 어머니가 자식들 불화에 속상하지는 않으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