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때 우리 가족은 마당이 아담한 작은 주택에 살았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처음으로 마련한 집이었는데 옆에 단칸방이 딸려 월세를 놓고 있었다. 그 방에 이사 온 사람들은 젊은 군의관아저씨 부부였다.
아줌마, 아저씨 모두 사근사근한 서울말을 쓰고 부드럽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이 어린 내 눈에 어찌나멋있어 보이던지 금세 아줌마에게 반해버렸다. 아줌마의 서울 말씨가 듣기 좋아서 그 집에 자주 놀러 갔다. 내가 놀러 가면 아줌마는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고 같이 놀아주었다. 아줌마와 놀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 되어 아저씨가 퇴근해서 집에 왔다. 아저씨는 007 가방 같은 걸 들고 다녔는데 그 가방이 너무 신기했다. 그런 가방을 처음 봐서 그런지더 멋져 보였다.
가방 위에 달린 쇠로 된 연결고리를 옆으로 철커덕 철커덕 제쳐야만 열리는 가방 안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게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하루는 아저씨가 가방을 눕히더니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리를 젖히고 가방을 열었다. 슬로 모션처럼 열린 가방 안에는 아몬드초코볼 여러 개와 과자, 노트, 펜만 들어있었다.
"의사 선생님 가방에 왜 초코볼만 많이 있어요?"
나는 진짜 궁금해서 물었는데 아줌마와 아저씨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게 뭐가 웃긴 건지 잘 몰랐지만 나도 따라 웃었다.
아저씨는 나에게 아몬드 초코볼이 아저씨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라고 하면서 한 통을 줬다. 첫맛은 달면서 씹을수록 고소한 아몬드 초코볼 맛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도 가끔 마트에서 아몬드 초코볼을 볼 때면 아저씨가 007 가방에서 꺼내주던 아몬드 초코볼이 생각난다. 나에게 아저씨의 007 가방은 요술 가방 그 이상이었다.
지금도 좋아하는 아몬드 초코볼
수업이 끝나고 조용한 교실, 방과 후 수업을 마치고 1학년 우리 반 친구가 인사를 하려고 교실에 들렀다. 아이는 방과 후 수업 이야기를 하다 옆에 놓여있던 내 가방을 보고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물었다.
"선생님 가방에는 뭐가 들어있어요?"
그 순간 어릴 적 군의관 아저씨의 가방을 보고 가졌던 신비스러운 경외감이 떠올랐다. 이 아이도 내 가방에서 뭔가 의미 있는 걸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 아주 중요한 게 들어있어."
나는 가방에 손을 넣어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까만 눈동자가 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자, 이거!"
마침 가방에 들어 있던 젤리를 꺼내 아이에게 건넸다.
"선생님 가방에 들어있는 게 다 하ㅇㅇ 젤리예요?"
"아니, 지윤이가 운이 좋네. 딱 하나 있었는데 마침 지윤이가 왔지 뭐야."
젤리를 받아 든 아이는 기분이 좋아져 집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선생님 가방은 요술가방이에요."
군의관 아저씨 가방에 청진기가 들어있었다면 40여 년이 지난 지금 까맣게 잊힌 기억이 되었을 것 같다. 아저씨가 가방에서 꺼내준 초코볼 덕분에 지금도 그 순간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초콜릿이 들어있던 아저씨의 007 가방도 하리보젤리가 들어있던 내 가방도 그 순간 옆에 있던 나와 아이에게는 요술가방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추억과 행복의 씨앗이 들어 있는 요술 가방이었으면 한다.
내 가방에서 나오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기발한 생각이 행복과 성장의 씨앗이 되어 아이들의 가슴에서 잘 자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