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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Aug 14. 2023

낭만과 건강 사이

스콘 굽기를 포기하다.

한 때는 자주 스콘을 구웠었다. 딸아이와 단둘이 떠났던 영국 여행에서 맛본 스콘은 잊히지 않는 맛이었다. 영국에 왔으면 꼭 먹어봐야 한다며 딸아이를 데리고 찾아 간 코벤트 가든 지하의 위타드는 생각보다 아담하고 소박한 카페였다. 작은 원목 테이블에 둘이 마주 앉아 점심으로 먹을 애프터눈 티 세트를 주문했고, 잠시 후 노릇하게 구워진 스콘과 잼, 하얀 크림이 올려져 있는 이층 트레이와 홍차가 담긴 티팟이 함께 나왔다. 고풍스러운 찻잔과 함께 세팅된 이 모든 것은 짧은 일정으로 방문해 바삐 움직이는 우리 같은 단기 여행객에게는아끼던 시간 한 조각을 먹는 우윳빛 낭만이었다. 따뜻한 스콘에 딸기잼과 하얀 클로티드 크림을 발라 한 입 베어 물면 스콘의 투박한 질감이 따뜻한 온기와 달콤한 잼에 섞여 살며시 입 속에서 맴돌다 사라졌다. 빵을 먹으며 느낀 감정치고는 꽤 깊이 있는 행복감이었다. 꽃향기가 은은한 홍차와 함께해서 였을까, 나와는 달리 차분하고 정적인 순간을 즐기는 딸과 함께해서 였을까 스콘을 먹는 순간은 모든 동작이 슬로 배속을 건 것처럼 소리 없이 우아했다.


 영국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서도 위타드의 스콘 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유튜브를 뒤져 영국식 스콘을 검색했다. 영국 할머니에게 배워왔다는 유튜버의 스콘 레시피가 왠지 모르게 끌려서 영상에서 알려준 버터와 소다, 밀가루를 주문하여 처음으로 스콘 베이킹에 도전했다. 겉은 바삭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따뜻한 스콘이 눈앞에 완성되었다. 위타드에서 사 온 꽃잎 향기가 나는 홍차와 딸기잼을 내어 놓아 분위기를 내보았다. 처음 먹었던 그 순간이 퇴색되지 않을 만큼은 되는 꽤 괜찮은 맛이었다.


 그 후로 몇 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은 스콘을 구워 가족들에게 간식으로 제공하거나 지인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스콘을 굽고 식혀서 작은 포장지에 담아 '핸드 메이드' 스티커를 붙일 때의 내 마음은 스콘을 받을 사람의 행복까지 가져다 쓰고 있었다. 스콘을 만들고 포장해 전달하면서 그들의 행복한 반응을 보는 과정이 내가 타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인 양 마음까지 보드레해지곤 했다.


 그러다 게으름이 무거워져 잠시 베이킹을 쉴 때 건강 관련 책을 탐독하게 되면서 결국에는 밀가루를 끊기로 결심했다. 겉으로 보기에 모든 수치가 완벽하고 건강해 보이는 남편의 장기들이 이제 많이 사용했으니 as 해달라며 일동 결기 띈 모습으로 각종 수치에 문제를 보이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밀가루를 끊고 나니 식탁에 낭만을 선사하던 스콘과 홍차도 사라지고 남편과 자주 가던 카페 베이커리에도 발길이 멀어졌다. 스콘과 홍차대신 사과와 찐 당근을 갈아 만든 AC주스와 줄 맞춰 썬 삼색 파프리카가 식탁에 올려졌다. 식탁 위 색깔은 화려해졌지만 우아한 낭만은 사라졌다. 카페 베이커리에 앉아 서로를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대신 같은 방향을 보고 손을 잡고 공원을 산책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여유와 과거를 추억하는 낭만이 그립기도 했지만 나는 다시 스콘을 굽지 않았다.


 그러다 몇 달 후 약속이 있어 들른 베이커리에서 온기가 사라진 스콘을 사 먹었다. 원래 이렇게 퍽퍽하고 목이 막혔었나. 한 때 우아한 낭만을 선사했던 스콘의 서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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