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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Aug 22. 2023

키오스크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나

나이듦의 미학


"내가 이렇게 나이가 들고 늙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엄마도 어렸을 적에는 마냥 젊을 줄 알았지."

 고등학교 시절 엄마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이다.

 그때였던 것 같다. 엄마도 한 사람의 인간과 여자라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


 우리가 그 이야기를 나눴을 때의 엄마 나이를 따져보면 지금의 내 나이쯤이다. 지금 나는 30년 전 엄마의 나이가 되었고 내 딸은 내 나이가 되었다. 엄마의 그 말이 내가 알지 못하던 또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 열린 것처럼 적지 않은 충격이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 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노우"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이들이 자란 만큼 주름도 늘고 가끔 내가 몇 살인지도 깜빡할 만큼 적지 않은 나이가 되었지만 지금의 내 나이가 좋다.


 직장 다니면서 두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어서인지, 유난히 철없던 젊은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하루에 열두 번씩 이불 킥할 순간이 많아서인지 이유는 흐릿하지만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가끔은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반기를 들고 싶은 순간이 있는데 바로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을 하거나 서브웨이 같은 곳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선택해야 할 때이다.


 한 번은 와플이 주 전공이라는 와플 College에 맘먹고 와플을 사러 갔다. 문을 힘껏 열고 들어가 메뉴판을 보며 잠시 고민한 뒤 점원에게 "오리지널 와플 주세요." 하고 말하자 "키오스크로 주문해 주세요." 라며 빠른 대답이 날아왔다. 머쓱하게 출입문 옆에 있던 키오스크(들어올 땐 보이지도 않던) 앞으로 가서 섰다. 오리지널 와플을 선택하고 나서도 생크림 종류, 토핑 종류 등 꽤 여러 단계를 거쳐야만 주문이 완성되는 시스템이었다. 주문 시간이 지체되자 내 뒤에 줄을 서 있던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둘이 무지하게 신경이기 시작했고 키오스크 안의 글자들이 갑자기 내 눈앞에서 부유했다.

  '아줌마가 늦게 고른다고 속으로 불평하겠네. 왜 이렇게 글자가 눈에 안 보이냐'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도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땀이 솟아올랐다. 먼저 주문하라고 양보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어찌어찌 주문을 마쳤다.


 컴퓨터로 일을 하는 직업이라 기계도 웬만큼 다루는 나도 키오스크 사용이 이렇게 낯선데 60대 이상 노인 분들은 주문하는 것부터가 큰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들면 배우고 적응해야 할 것이 많아지는데 대부분 기계와 관련된 것이 많고 나이 듦이 잠시 거만한 게으름을 피우면 따라잡지 못할 만큼 도망가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작아졌다.


 몇 달 뒤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를 주문할 때는 더 복잡해진 난코스에 시험을 치르는 것 마냥 가슴이 콩닥거렸다.

  "빵은 어떤 걸로 하시나요?"

기껏 고민해서 샌드위치 종류를 골랐는데 빵까지 골라야 하다니.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딸이 "엄마 여기에 빵 종류 나와있어요." 하며 눈에서 불과 20cm밖에 떨어지지 않는 유리 선반에 새겨진 빵과 소소 종류를 가리킨다. 와플 가게에서와 마찬가지로 가까이 있는 건 더 안 보인다. 눈을 매직아이처럼 뜨고 초점을 흐리게 해야 앞에 있는 모든 게 다 보이는 것인가. 딸아이의 도움으로 점원이 물어보는 모든 것에 적절한 타이밍으로 대답하는 데 성공했다. 주문하는데 유난히 행동이 빠른 MZ세대들 틈에 시간을 끄는 진상 손님이 되지 않고 무사히 주문을 마친 것에 서글픈 희열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손님은 모두 10~20대의 젊은 사람들뿐이었다.


 집에 와서 키오스크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에 대해 이야기를 했더니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었다.

 대학생이 된 아들은 주말을 이용해 이순신 장군의 해전으로 유명한 명 O 핫도그에서 일을 하는데 매장에 노인분들이 오시면 그분들만의 주문 공식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  명 O 핫도그에는 열 가지가 넘는 핫도그 종류가 있는데 하나같이 "핫도그 하나 주세요."라며 주문을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아들이 "핫도그 종류가 통모짜 등등 이렇게 있으니 무얼 드릴까요?" 하고 말을 하면 아 그럼 나는 "통모찌로 줘."라고 한다는 것이다. 노인분들에게는 모짜렐라의 '모짜'보다 찹쌀모찌의 '모찌'가 더 익숙한 법이니까.


세 번째, "설탕 묻혀 드릴까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인상을 쓰며 "아이고, 나는 그런 거 안 먹어."라고 하고

"소스는 뭘로 뿌려 드릴까요?"라고 물으면 이번에는 손사래까지 치며 "그런 거 안 먹는다니까." 하며 약간의 짜증이 묻어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아들의 말을 듣고 한참 웃고 나서는 내가 키오스크에서 느낀 부담감과 그분들이 주문하면서 느낀 거추장스러움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호떡하나요, 풀빵하나요 한 마디면 원하는 간식을 사 먹던 우리 세대에겐 왜 이렇게 많은 과정을 거치면서 사 먹어야 하는지 그 과정이 작은 소동으로까지 느껴질 수 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개량하고 선택해서 먹는 요즘 세대의 간식을 보며 그 세대만의 뚜렷한 개성과 기호가 간식에서부터 사회의 여러 부분까지 반영되면서 사회를 다양하게 변화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 없이 불편하게 살았지만 기계가 없어 일자리도 많았던 우리 세대와 기계 덕분에 재밌고 편하게 살고 기계를 내 몸 다루듯 잘 다루지만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가는 요즘 세대를 보며 두 세대 간의 간극을 메워줄 여유 있는 친절과 도움이 서로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와 기술에 적응해야 하는 우리 세대에게 조금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기다리며 알려주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와 기술에 맞서 일해야 하는 요즘세대를 위해 그들의 개성 있는 행동과 말에도 따뜻한 온도로 이해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면 더 살만하지 않을까.


"아들, 그래도 노인분들 오시면 친절하게 알려드리고 있지?"

"그럼요. 엄마 생각하면서 친절하게 알려드리고 있죠. 하하"


서로  좀 봐주면서 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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