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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있는 감각, 새로운 시각

리스본을 걷다.

by 리인


포르투갈을 다녀온지 석달이 지났다.


항상 여행을 가기 전에 한글 파일에 일정을 도식화해서 정리하고

동선을 따라 밥을 먹을 식당을 정해놓았었다.


좋은 숙소를 한 두 달 전에 예약해 놓고

여행 카페를 뒤져서

다른 사람들이 올려놓은 사진 속 행복을

빠짐없이 내 기쁨으로 훔쳐오고 싶었다.


현실의 피곤한 얼굴로

막연한 여행을 구체화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가올 여행의 준비를 위해 들이는 시간이여행을 가서 느끼는 행복의 다섯 배 강도로 투입되곤 했다.


여행지에 가지 않고도 그곳에 가본 것 같은 기시감에 여행지에서는 정작 무감각해졌다.


그런 여행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여행이 부담스러워졌다.


여행이 나에게 일이 되었다.


만났을 때

가장 정돈된 모습으로 준비되어야 하고

낭비하는 시간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까다로운 연인에게

질려버린 것 같았다.


6년 동안 해외여행과 이별을 고했다.

더 이상 편하지 않고 설레지도 않는 연인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주듯

팬데믹이 이어졌고 식구들은 각자 바빴다.


그러다 6년 만에 단단하게 얼은 마음의 얼음을 깨고

포르투갈로 향했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도 단순했다.

직항이 새로 생긴 곳,

비행기 티켓이 남는 곳.


a4용지 두 장을 가득 채운 계획도 없었다.

몇 달 전 숙소 예약도, 여행 카페 훑기도 없었다.


떠나기 3일 전 숙소를 예약하고

리스본에서 포르투로 떠나는 기차표와

포르투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표만 끊었다.


그냥 리스본 공항에 던져진 나에게 물었다.

넌 어디를 가고 싶은 거니?

무엇을 보고 싶은 거니?

무엇을 느끼고 싶은 거니?


그냥 리스본 거리를 걷고 싶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리스본 거리를 걸었고

오르막길을 올라

전망대로 갔다.


푸른 새벽 아래 오밀조밀 자고 있는 주황색 지붕,

안개를 덮고 있는 테주 강,

바람이 실어다 주는 강의 냄새,

수증기를 머금은 수줍은 공기의 결.


리스본을 떠나고 45일이 지난 지금

나에게 떠오르는 것은

그 새벽 전망대에서 나를 깨우던 감각이었다.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돌아다녔던 순간보다

리스본의 아침에 느꼈던 감각이

더 오래도록 나를 붙잡았다.

여행지에서 내가 만나야 할 것은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이었다.


눈앞의 풍경을 보느라

나를 깨우는 감각을

새로운 시각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는지.


하루하루를

새로운 삶의 여행으로 살되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새로운 시각과

깨어있는 감각으로 살자.


이번 여행은

자고 있는 나를 깨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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