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첫날, 리스본 근교 영어 투어를 위해 우리 가족이 탑승한 밴에는 모두 여덟 명이 타고 있었다.
텍사스에서 왔다는 멕시코 출신 미국인 커플,
캐나다에서 우체부 일을 하고 있다는 캐나다 청년,
이탈리아 에서 왔다는 미국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 커플, 그리고 우리 가족 셋.
미국인 부부는 동글동글한 얼굴이 20년을 산 부부처럼 닮아 있었다. 2주에 걸쳐 결혼 1주년 여행을 하는데 포르투갈이 첫 여행지라고 했다.
페냐 궁전에서 자유 관광을 끝내고 가이드를 기다릴 때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아줌마의 오지랖을 섞어 물었다.
남편이 진해에서 미해군으로 근무하던 중 지혜 씨를 만나 현재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진해라면 내 고향이었다. 내가 자라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이 아직도 살고 계신 곳. 우리는 헤어진 자매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다 같은 여고를 졸업한 것까지 알게 됐다.
낯선 나라에서 만난 투어 메이트가 고향 후배라는 사실은 심리적 벽과 경계를 한순간에 허물게 만들었다. 그녀는 미국 간호사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앳된 얼굴이지만 벌써 서른 살이 되었다는 그녀의 미소는 비슷한 결의 귀여움을 품은 남편의 미소와 참 잘 어울렸다.
일정 중 아제나스 두 마르에서 우리 부부를 멋있게 사진에 담아 그녀는 내게 깜짝 선물을 해줬다. 그녀가 찍어준 사진은 나의 포르투갈 사진 중 최애 사진이 됐다.
셋째 날은 벨렝 지구 투어를 하는 날이었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는 그 나라의 역사와 현지 생활에 대해 듣는 걸 좋아한다. 다른 관광지는 몰라도 대항해의 역사를 지닌 벨렝지구라면 가이드 투어를 하고 싶었다.
투어 가이드는 바바리코트에 머플러를 두른 긴 머리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영국에 워킹 홀리데이를 갔다가 포르투갈로 여행을 왔었다고 했다. 그렇게 포르투갈에 반해서 포르투갈 현지 여행사에 지원했고 지금은 브라질 출신 남편을 만나 리스본에 살고 있다고 했다.
20대였을 그녀가 타국에 혼자 와서 결혼도 하고 자신의 일도 야무지게 잘하는 모습이 용기 있어 보였다. 젊은 날의 나는 그렇게 과감하지 못했는데.
이동하는 중간에 그녀가 말했다.
제가 전생을 좀 봅니다.
무슨 과목을 좋아하는지 말씀해 주시면 대항해시대의 직업을 알려드릴게요.
재밌는 이야기를 해줄 것 같은 그녀의 제안에 솔깃해 나는 좋아하는 과목이 ‘영어’라고 말했다.
영어를 좋아하신다면 선생님은 수도사였습니다.
수도사는 배를 타고 먼 타국땅으로 가서 몇 년 동안 살면서 현지 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향수병, 전염병 등으로 살아 돌아올 확률은 다소 낮습니다. 거기다 가장 큰 도전은 대머리를 고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수리를 밀고 주변머리만 남긴 수도사 머리를 꼭 해야 하지요.
대머리라는 말에 나는 수도사를 포기했다. (1972년부터 교황 바오로 6세가 금지시켜 현재는 이 머리 스타일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옆에 있는 남성분이 자신은 ‘과학’을 좋아한다고 했다.
과학자는 다 좋은데 상사의 벽이 너무 높습니다. 어떤 일을 해내든, 어떤 공을 세우든 모든 것은 해양왕 엔리케의 것이 되니까요.
그녀가 딸아이에게 말해보라고 하자 딸아이는 ‘수학’이라고 했다.
수학자는 항해를 할 때 별의 각도를 계산해서 배가 나아갈 방향을 알아내야 해요. 계산이 잘못되면 항해가 오래 걸리게 되고 항해 날짜가 길어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당시 배에선 비타민 C 부족 때문에 괴혈병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죠. 책임감과 스트레스가 아주 큰 직업입니다.
꽤 오래 걸어서 이동하는 구간인데도 그녀의 입담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선 왕명을 짓는 게 아니라 선택해요.
훌륭한 왕이 있으면 그 왕의 이름을 따라 합니다.
우리나라는 작명의 개념이지만 이곳에선 택명의 개념이지요.
그래서 임신했을 때 택명을 해서 바로 이름을 지어버립니다.
태명이라는 것이 없어요.
아버지가 네이마르이면 아들도 네이마르라고 짓기도 해요. 네이마르 주니어라고요. 아버지와 이름이 같으니 집에서는 주니어라고 부르죠.
우리나라는 태어나서 사주팔자로 이름을 지으니 태명이 있고 태어난 후 이름을 짓는 게 일반적인데 말이죠.
그녀는 역사, 문화 지식도 해박하고 이야기를 재미있게 술술 풀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한마디로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거기다 우리의 점심식사 장소였던 타임아웃마켓의 맛집 메뉴를 정리해 카톡으로 전해주는 세심함까지 보여 주었다.
세심한 이야기꾼 가이드 주연 씨와
다정한 고향 후배 지혜 씨.
두 사람 모두 어린 나이에 한국을 떠나 리스본과 나폴리에서 결혼 생활을 하며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모습이
노을빛을 닮았다.
포르투갈 여행을 끝내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만난 노을.
노을은 해가 다 지고 난 후에 더 붉다.
해가 다 넘어가고 난 후에야 하늘을 완전히 붉게 물들일 수 있다.
황홀한 붉음과 찬연한 보라로 물든 노을을 보려면 해의 일주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하듯 그녀들의 하늘을 더 아름답게 물들일 순간이 오고 있다.
아직 해가 산을 넘어가고 있다.
눈에 띄진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산을 넘어가는 중이다.
더 붉고 아름다운 노을빛을 만들려.
한 줄 요약 : 포르투갈 여행 중에 만난 그녀들의 노을빛이 더 아름답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