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침묵의 생기로 글을 쓰다.

by 리인

침묵은 소리 없는 빛이면서 생기를 가졌다.

침묵의 생기는 기억마다 다르다.


나는 침묵이 좋았다.

아버지의 잠을 방해하지 않는 하얀 침묵이 좋았고

엄마와 아버지가 싸우지 않는 진공 속 침묵이 좋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빈 공간의 침묵이 좋았다.


어느 날 밤, 아버지와 엄마가 다툴 때

어린 나엄마에게 다가가 말했다.


"엄마, 아빠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버지가 하는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길 바라며 엄마에게 부탁했다.


하지만 엄마는 날카로운 말로 침묵의 공기를 갈랐고

아버지는 둔중한 목소리로 침묵의 유리창을 깼다.

와장창

어느 순간 진짜 유리창이 깨졌다.

유리창 아래쪽에 여러 개의 금과 틈을 생겼다.


아버지는 창문을 떼어다가 방바닥에 놓았다. 그리고 다시 들어 올려 방바닥에 내리쳤다.

유리의 금 가는 소리는 허공에도 날카로운 실금을 그었다.

아버지가 유리창을 내려놓을 때마다 내가 원하던 침묵은 생기를 잃었다.


"아빠, 하지 마."


어린 나는 용기 내어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깨진 유리를 버리려면 먼저 잘게 부수어야 된다고 하셨다.


미리 말해줬으면, 그래서 침묵을 깨야 한다고 알려줬으면.


내가 지키고 싶은 침묵 속에는 깨져야 좋은 침묵도 있다고 침묵은 내게 속삭였다.


어릴 적 나의 침묵은

내 마음속 떨림을 지키기 위한 고요한 소용돌이였다.


고요한 소용돌이를 깨야할 때는 상대를 위한 배려가 침묵을 이길 때였다.

침묵을 깨기 직전의 침묵은 가장 따뜻한 생기를 지니고 있었다.


유리창이 깨지던 순간, 아버지는 침묵했다.


어느 날 새벽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창문 소리는 어릴 적 그 순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았다.


깨진 유리창을 부수어서 버려야 하는 아버지의 책임은

아버지를 지키는 침묵과 나를 위한 문장 사이에서 고뇌했다.


그날 새벽 나는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침묵은 아버지의 흔들리던 영혼을 세우던 보호 장치였다.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침묵은 새벽의 감각적인 침묵이다.

새벽의 침묵 속엔 모든 감각이 살아있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 나의 시선과

적당한 질감이 느껴지는 종이의 감촉과

내 움직임에 따라 잠을 깨는 공기의 하품소리와

서늘하고 상쾌한 새벽 냄새가 어울려

침묵의 생기를 만든다.


아버지를 위해 지켜져야 했던 세상의 침묵,

내가 바랐던 엄마의 침묵,

당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침묵,

내 세계를 세우는 새벽의 침묵.

새벽의 침묵은 숲을 가장 많이 닮았다.


내 세계의 침묵은 사람에게까지 이어져

침묵의 차를 가운데 놓고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을 좋아한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 아무 말이나 꺼내야 하는 사이라면

차라리 혼자인 편이 낫다.

다행히 지금 내 곁엔 침묵과 함께여도 편한 사람만 남았다.


숲을 닮은 새벽의 침묵이 좋아

매일 새벽을 만난다.


침묵이 가장 활발한 생기를 가지는 새벽,

내가 원하는 침묵의 생기로

숨쉬듯 글을 쓴다.






keyword
이전 09화걱정의 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