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를 말하다(브런치북 속의 작은 브런치북)
상처를 주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자신이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때
상처를 받는 사람은
상대를 미워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화와 미움이 상대를 향한다는 사실 자체가 힘들었다.
내가 나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 대상이 가까운 사이라서 더 그랬다.
내가 가장 절망했던 순간은
이젠 어느 정도 괜찮아졌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상대와 나를 마주했을 때였다.
그간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 같았고
언제 또다시 긁힐지 모를
상처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으니
내가 변해야 했다.
상처를 주는 사람을
변화시키겠다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어떻게 바꿔야 할까.
상처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상처를 준 사람에게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게 나쁜 일일까.
내게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은 자연이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일이 자연이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라면 악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걸 불편해하는 나를 발견했으니
부정적인 감정을 키우는 것을 최소화해야 했다.
내 감정에 먹이를 주어 감정을 키울지
내 정신에 먹이를 주어 정신을 세울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었다.
화와 미움의 감정에 몰입하려는 나를 멈춰 세웠다.
다음에 또 상처가 긁히는 순간이 올 때를 대비해
상처를 보호할 수 있는 쿠션이 좋고
단단한 정신의 보호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삶의 철학을 읽고 느끼고 사유하고 글로 썼다.
매일 새벽, 매일 저녁 반복했다.
잉여시간이 생산적인 시간으로 대체되니
부정적인 감정에 먹이를 내어 줄 시간이 없어졌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어올 틈이 줄어들었다.
부정적인 감정에 몰입하는 건
삶에서 받은 선물의 흠을 보고
왜 이런 걸 주냐고
신에게 불평하는 진상 손님이나 다름없다.
선물 자체보다 흠에 집중한다면 불평을 일삼는 진상손님으로밖에 살 수 없었다.
삶은 상처와 치유가 공존하는 흠이 있는 선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