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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Nov 15. 2023

카스테라 기계를 아십니까?

카스테라, 사람과의 관계를 배우다


 카스테라 기계를 아십니까? 이 기계를 보고 아~하고 기억이 나신다면 아마 80년대에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던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물건인데요. 온 가족이 함께 카스테라를 만들던 시간은 유년시절 중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먹거리가 그리 많지 않던 시절, 집에서 만드는 카스테라와 도넛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죠.


 엄마가 계란을 톡하고 깨서 흰자와 노른자를 조심스럽게 분리하면 흰자를 거품기로 치는 건 언제나 아빠 몫이었습니다. 힘이 세던 아빠가 한 수십 번 정도 흰자를 치면 흰자는 단단한 거품이 되어 거꾸로 들어도 흘러내리지 않는 멋진 머랭이 되었습니다. 주르륵 흘러내리던 계란 흰자가 중력을 이기고 나름 줏대있는 물질로 변하기까지 아빠의 팔뚝은 힘줄을 불끈 불끈 보이며 열심히 일을 했지요. 자신이 가진 성질을 바꾸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십번은 시도해야 조금씩 변화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계란 흰자도 그런데 사람은 오죽하겠습니까?


 엄마는 땡땡이 처럼 모인 노른자들 위에 하얀 밀가루를 우르르 쏟아 붓습니다. 주걱으로 밀가루와 계란을 섞는데 뻑뻑해서 잘 섞이지 않습니다. 그때 우유 한 컵을 주르륵 흘려줍니다. 우유를 넣고 주걱으로 섞으니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마요네즈같은 반죽이 완성됩니다. 우리 주변에도 카스테라 속 우유처럼 다른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잘 섞이게 하고 관계에 적당한 점탄성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지요. 카스테라를 만들 때 우유는 단연 분위기 메이커입니다.


 달달한 카스테라에 설탕도 빠질 수 없지요. 엄마는 설탕 봉지를 들어 거침없이 툴툴 털어넣습니다. 치명적인 단맛! 사람들중에도 내 몸에 안 좋은 건 아는데 치명적인 매력때문에 자꾸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지요. 애 목욕시키러 가야하는데 당구 게임만 더 하고 가자는 친구, 저녁하러 가야하는데 애들 밥은 시켜주고 조금만 더 얘기하다가자는 친구. 나이가 드니 친구 관계도 점점 가지가 쳐지는 것이 같이 놀자고 조르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친구가 있다면 언제든 달려나가고 싶네요.


 드디어 반죽 준비가 끝났습니다. 둥그런 알루미늄 쟁반에 신문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깔고 반죽을 조심스레 붓습니다. 두둥 그 위에 머랭이 된 계란 거품을 살포시 올리지요. 엄마는 적당한 손목힘으로 두 재료를 살살 섞어줍니다. 서로의 성질이 잘 보존되면서 적당히 섞여 부드러움과 풍미를 고조시켜줄 정도로만요. 사람과의 관계도 이 정도가 딱 적당하겠지요.

 

 30분 쯤 후 뚜껑 유리 너머로 갈색빛으로 부풀어 오른 카스테라가 보이면 오빠와 나는 흥분하기 시작합니다. 달콤하고 고소한 카스테라 냄새가 퍼지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소리칩니다.

"다 됐다. 다 됐다."

 아빠가 뜨거운 카스테라를 꺼내 쟁반 위에 올리면 엄마가 케이크를 자르듯 카스테라를 쓱석쓱석 잘라줍니다. 노랗게 익은 카스테라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옵니다. 카스테라를 위해 임무를 다한 신문지를 살살 벗겨내고 한 조각을 뜯어 입에 넣습니다. 빵에 있는 작은 공기 구멍마저도 달게 느껴지고 몇 번 씹고 나면 나도 모르게 부드럽게 넘어갑니다. 달달하고 적당히 부드러운 구름같던 카스테라 맛은 잊을 수 가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제과점에서 파는 카스테라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 달고 너무 부드러워서요. 아빠가 만든 거품은 인간적이어서 카스테라를 조금 거칠게 만들었는데 그 식감이 투박하지만 좋았습니다.

좀 서툴러서 좀 덜 부드러워서 좀 덜 달아서 좀 못생겨서 더 좋았습니다. 딱 우리 가족처럼요.


 어린 시절 아빠가 몸이 안 좋으셔서 가족끼리 놀러간 추억이 별로 없어서일까요? 영화 속 주인공이 행복한 추억을 떠올릴 때 환한 빛 속에서 가족이 함께 웃고 이야기하던 장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저에게는 가족들과 같이 카스테라를 만들던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습니다.


 호기심에 요즘도 카스테라 기계를 팔고 있나 검색해보니 이젠 안파네요. 대신 중국산 수플레 기계가 판매되고 있는데 우리 집 씽크대 저 안 쪽에서 몇 년째 빛을 못보고 있는 와플 기계를 생각하며 검색 창을 닫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카스테라' 같은 추억의 간식이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아직 물어보진 않았지만 옛날 우리 집처럼 정기적으로 간식을 만들지도 않고 요즘은 새롭고 맛있는 간식이 넘쳐나니 아이들에게 '나의 카스테라' 만큼 특별한 우리 집 간식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음식과 관련된 행복한 추억하나는 만들어 주고 싶어지네요. 추억 부자는 어떤 부자보다 배가 부를테니까요. 여러분은 어떤 추억의 간식을 간직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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