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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들이 Nov 17. 2023

감자탕을 끓이면 게으름을 피워도 괜찮습니다.

감자탕에서 배우는 관계의 깊이

 저는 요리에 소질이 없습니다.

신혼 초였던가 엄마가 해주시던 경상도식 빨간 소고깃국을 끓이려고 했으나 고춧가루국을 만들어버린 기억이 납니다. 아무리 오래 끓여도 국간장을 넣어도 엄마가 해주시던 맛이 안 나서 결국 다 못 먹고 버렸습니다.

 요즘은 요리 블로그도 있고 유튜브도 있으니 저 같은 사람에게는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나에게 청소와 요리 중 하나를 해야 한다고 하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요리를 선택합니다. 끝이 없는 집안일을 해야 할 때 네 가지 원칙에 따라 청소를 미룰 궁리를 합니다.    

 

1. 급하고 중요한 일

2. 급하진 않지만 중요한 일

3. 급한데 중요하지 않은 일

4.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   

  

 저에게 요리는 급하고 중요한 일에 해당합니다. 엄마는 항상 '논에 물 들어가는 거랑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것처럼 보기 좋은 게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식구 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처럼 보기 좋은 게 없습니다. 식구들 맛있고 건강한 음식 먹이는 것만큼 급하고 중요한 일이 어디 있나요. 그리고 뭐랄까 요리는 결과물이 나오니 성취감이 생긴다고 해야 할까요.

 반면에 저에게 청소는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속합니다. 청소를 해도 티도 안 나고 금방 더러워지니 항상 미루게 됩니다. 같이 사는 짝꿍이 청소를 2번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들이 고등학생 때 내가 끓여준 된장찌개를 먹으며

"엄마, 이 된장찌개는 혼자 자취하면서 먹으면 눈물이 나올 만큼 그리운 맛이에요."

하고 말하는 걸 듣고는 아들의 눈물 버튼 음식이 된장찌개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열여덟 살 녀석의 입맛이 참 토속적이기도 하지요. 맛있게 먹으면서 표현까지 예쁘게 해주는 아들에게 살짝 감동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내가 해주는 감자탕 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에서 감자탕을 한다고 하면 다들 놀라지만 감자탕만큼 쉬운 음식도 없습니다.

맛있는 요리를 하려면 실력이 아니라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랜 시간을 투자한 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요. 다른 일을 할 때도 시간을 투자하면 타고난 실력이 없더라도 좋은 결실을 맺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도 생겨났겠지요.

    

 감자탕을 만들려면 먼저 돼지 등뼈의 핏물을 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머리와 마음에 계속 채워 넣기만 하면 번아웃이 오잖아요. 내 안에 있는 스트레스와 상처를 핏물 빼내듯 빼내야 삶이 담백해지는 것처럼 등뼈의 핏물도 빼내야 감자탕이 더 담백해집니다. 그리고 돼지 등뼈를 뜨거운 물에 한 번 데쳐내야 합니다. 그래야 쓸데없는 잡내가 사라져요.     


 등뼈까지 다 삶았으면 그다음은 재료를 넣고 끓이면 끝입니다. 주말 동안 감자탕만큼 훌륭한 한 끼 아니 세 끼도 없습니다. 한 번 해놓으면 하루 종일 음식을 안 해도 되거든요. 몇 끼를 먹어도 가족들이 지겹다는 소리를 안 합니다. 마지막에 라면을 넣어 끓여 먹거나 볶음밥을 해 먹어도 되니 감자탕은 만능해결사입니다. 우리 삶에도 한 번에 여러 일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시 레시피로 돌아와서 등뼈가 잠길 정도의 물을 붓고 신김치, 삶은 시래기, 된장(핵심재료), 맛술, 간 마늘, 고춧가루를 넣고 1시간 푹 끓입니다. 마지막으로 비장의 무기 들깨가루를 듬뿍 넣고 끓여주면 가게에서 파는 감자탕과 비견할만한 합니다. 뼈에 붙어있는 살이 어찌나 실하고 부드러운지 놀랍니다.     


 주말 아침에 이렇게 끓여 놓고 나면 그날 하루는 게으름을 마음껏 부려도 괜찮습니다. 너무 행복하지요. 살면서 내가 잘못하는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 정도는 하게 되나 봅니다.     


 감자탕이 중불에 오랫동안 뭉근하게 끓여야 국물 맛이 깊어지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오랫동안 따뜻하고 뭉근한 온도로 서로를 잘 데워야 깊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에는 깊은 맛을 내지 못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깊은 맛을 뿜어내는 감자탕은 평소에는 그 농도가 깊은지 모르고 살다가 몸이나 마음이 고장 나면 뽀얗게 우러나는 국물처럼 진한 애정을 녹여내여 따뜻하게 품어주는 가족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감자탕을 끓이는 이유가 단지 한 번의 요리로 세끼를 해결할 수 있어서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감자탕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자주 만들게 됩니다. 감자탕 한 솥을 식탁 가운데 놓고 가족이 빙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은 언제나 제 마음을 따뜻하게 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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