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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업 Dec 12. 2023

아무것도 없이 떠난 겨울 지리산 등산(2)




해발 1,000m를 넘어선 이후에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땀이 식지 않도록 계속 올라가야 했고, 손과 발이 얼지 않도록 계속 꼼지락거려야 했다.

그리고 빨리 대피소에 도착해서 우리가 싸 온 음식들을 먹고 있는 상상을 하면서 배고픔을 달래야 했다.


분명 등산을 시작했을 때에는 올라가거나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어느샌가부터 인적도 거의 없었다.

우리도 해발 100m씩 올라갈 때마다 "이제 000미터 남았다"라는 대화만 주고받았고, 그 외에는 어떤 대화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30살이 되는데, 그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30대부터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에 대한 잡다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수많은 선택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고 하는데, 내가 지금까지 했던 선택들은 어땠는가

내가 어렸을 때 머릿속에 그렸던 20대의 모습대로 나는 20대를 살아왔는가

당연히 내가 상상했던 대로 살아오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30대도 내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텐데, 철저하게 인생을 계획하는 게 의미가 없지는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는 정해놔야 일단 움직이기라도 하지 않을까


해발 1,000m부터 대피소까지는 사실 등산이라기보다는 사색의 시간이었다.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이러한 사색 덕분에 대피소까지의 등산이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아마 머릿속에 대피소까지 빨리 가야 할 생각만 했다면, 이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럽고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오늘의 목표였던 대피소에 도착하니 마치 정상에 다다른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새벽에 서울에서 출발하여 지리산에 도착하고, 여러 번이나 다시 돌아갈 위기가 있었음에도 결국 우리는 오늘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나를 이끌어준 가장 큰 원동력은 사색이었다.


역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도구가 아니라 생각일까?



천만의 말씀이었다.

우리는 대피소에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싸 온 고기와 컵라면을 먹을 생각에 들떠있었지만, 이것은 우리의 착각이었다.

왜냐하면 대피소에는 취사와 관련된 어떠한 도구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식수대도 얼어붙어 우리가 마실 수 있는 물도 없었다.


청천벽력이었다.

등산 장비는 없어도 다리와 정신력만 있으면 충분히 등산할 수 있지만, 취사도구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우리의 준비성이 이렇게나 형편없을 수가 있다니...

수많은 준비물 중 몇 개만 빠뜨렸다면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화가 났겠지만,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형편없는 준비성에 우리는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다행히 취사장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는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가 등산을 처음 해봐서 도구들을 가져올 생각을 못했는데, 혹시 다 쓰시고 좀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깨끗하게 닦아놓고 사례도 해드릴게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힘들게 올라와서 배부르게 만찬을 즐기고, 내일 새벽에 정상으로 향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저녁시간에 가스버너를 빌리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대신 흔쾌히 뜨거운 물을 빌려주신 분이 계셔서 컵라면은 먹을 수 있었다.

우리는 수많은 고기와 채소더미를 앞에 두고 컵라면으로라도 끼니를 때워야 했다.


그런데 뜨거운 물을 빌려주신 분께서 우리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는지, 밤 11시쯤에는 가스버너를 빌려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도 빨리 자고 일어나서 다음날 아침 일찍 정상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11시에 고기를 먹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지금 일찍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고기를 먹고 바로 출발하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친구들도 괜찮은 제안인 것 같았는지 흔쾌히 동의했다.


우리는 계획대로 새벽에 일어나서 빌려주신 가스버너와 고기를 챙겨서 취사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취사장에 전등이 안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시간대가 아니면 전기를 아예 꺼놓는 듯했다.

그렇다고 지금 시간에 관리자를 찾아가 전기를 켜달라고 얘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새벽 4시에 고기를 구워 먹겠다고 불 켜달라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고기를 반드시 먹어야 했기 때문에, 핸드폰 플래시라도 켜서 장비를 세팅했다.

고기가 익고 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었고, 가위로 잘라먹는 것도 우리에겐 사치였다.

우리는 목살이 어느 정도 구워진 것 같으면 한 덩이씩 잡고 그대로 뜯어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덜 익어서 질긴 고기에 불과했겠지만, 이때 먹었던 목살은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목살 중에 가장 맛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도 지리산 여행 얘기를 하면, 어두컴컴한 취사장에서 목살을 먹었을 때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새벽 4시 불도 안들어오는 취사장에서 플래시키고 목살을 구워먹는 모습


아무것도 없이 출발한 지리산 여행은 우리에게 최고의 추억을 가져다준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정말 도구보다 생각이 더 중요하냐?

당연히 아니다.

역시 사람은 도구를 잘 챙기고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빌린 가스버너를 깨끗하게 씻어 돌려드렸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짐을 챙겨서 나왔고, 대피소에서 파는 아이젠까지 장착했다.

정말 허접한 아이젠이었지만 이것마저도 없으면 정상까지 올라가기엔 정말 위험할 것 같았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새벽에 다시 출발해서 정상에서 일출을 보는 것이 목표였는데, 생각보다 눈보라가 심했다.

눈보라에 몸이 흔들릴 정도였고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게다가 너무 어두컴컴해서 헤드랜턴 없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우리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대피소까지 올라올 때의 패기로 일단 출발해 볼 것이냐, 아니면 정상에서 일출은 못 보더라도 눈보라가 잠잠해지면 그때 출발할 것이냐

일단은 대피소에 들어와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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