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피소에 들어와서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눴다.
정상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출발해야 했지만, 한겨울 새벽 해발 1,700m 부근의 지리산의 눈보라는 공포 그 자체였다.
대피소에서 이제 막 올라갈 준비를 하는 등산객들만 봐도 제대로 된 등산 장비들이 갖춰져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의욕이 넘쳤어도 지금의 눈보라를 뚫고 올라가기에는 무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눈보라가 잠잠해지면 출발하기로 했다.
대략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새벽부터 고기를 구워 먹고 나니 잠이 솔솔 왔다.
밤에는 워낙 추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잤었는지 눕자마자 바로 뻗어버렸다.
두 시간정도 자고 일어나니 등산객들로 북적였던 대피소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밖에 나가보니 우리 예상대로 눈보라도 잠잠해졌고 날씨도 정말 화창했다.
정상에서 일출을 못 보는 건 아쉬웠지만 대피소에서 맞는 아침도 나쁘지 않았다.
일출은 절경이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높은 곳에서 일출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꼭두새벽부터 정상으로 향했구나
이 모습을 정상에서 봤으면 더 좋았겠지만 어떻게 첫 술에 배부르랴
다음에는 장비들을 잘 챙겨서 지리산 정상에서 일출을 보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잠시 모든 생각들을 내려놓고 지리산 일출에 빠져있었다.
몇 분 뒤 우리는 짐을 챙겨서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까지는 해발 200m만 올라가면 됐기 때문에 어려운 코스는 아니었다.
게다가 대피소에서 구입한 아이젠도 있어서 훨씬 수월하게 올라갈 수 있었다.
대피소까지 올라올 때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올라와야 했기 때문에 지리산의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는데, 지금은 여유가 좀 생겨 중간중간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겨울 지리산 풍경에 감탄하며 올라가다 보니 정상에도 금방 도착했다.
정상인 천왕봉 부근에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아침에 일출을 보기 위해 출발한 분들은 이미 다 내려가셨나 보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추위와 바람에 오래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천왕봉의 비석을 보자마자 우리가 해냈다는 생각에 정말 뿌듯했다.
평소에 등산은 물론 공부만 해왔던 우리도 겨울 지리산을 정복할 수 있구나
심지어 아무런 장비도 없이 우리의 몸뚱이와 의지만으로
최고의 10분이었다.
우리가 지리산이 아닌 휴양지로의 여행을 택했다면 절대 이 웅장함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정상에 와보니 새삼 우리나라에 산이 정말 많구나도 느낄 수 있었고, 모든 걸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와보니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내년에는 꼭 합격하겠다는 다짐을 외치고 내려가기로 했다.
지리산을 내려와서 우리는 예약해 놨던 펜션에서 1박을 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2박 3일에 걸친 지리산 여행은 꿈만 같았다.
잠시나마 일상에서 탈출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지리산 정상이라는 목표까지 달성하고 왔으니 말이다.
이것이 내 인생의 축소판이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와 불가능할 것 같은 지금의 목표를 결국엔 달성해 내는 내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 말이다.
몸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지만 마음가짐은 많이 바뀌었다.
1년 차 때는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함에 쌓여 공부했다면, 2년 차 때는 해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지만 알바도 시작했고 짬 내어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나는 2년 차 수험생활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