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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업 Nov 26. 2023

아무것도 없이 떠난 겨울 지리산 등산(1)

어디로 여행 갈지 고민하고 있던 중 또 하나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다.

우리와 함께 스터디는 했지만 한국은행이 아닌 다른 기관으로 시험을 보러 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또한 최종면접에서 불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1년 동안, 아니 그 친구는 행정고시 준비를 그만두고 지금까지 거의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그 누구보다 일을 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가득했을 텐데, 행운의 여신은 그에게 한 번 더 등을 돌렸다.


마음이 정말 쓰리고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을 텐데, 그 친구 또한 결과를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내년에는 꼭 합격할 거라 다짐했다.

그리고 그 친구도 우리의 여행 계획에 대해 알았던 터라 함께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처음에는 제대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따뜻한 동남아로 휴양을 다녀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올해 죽기 살기로 함께 공부했던 동지들과 불합격의 아픔을 털어버리고 내년엔 꼭 합격하자는 결의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예정에도 없던 지리산으로 향했다.




우리가 지리산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이런 어려움쯤은 극복해 봐야 내년에도 자신감 있게 도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지리산 등산 후기 관련 블로그를 몇 개 찾아봤다.

지리산 정상의 해발고도가 1,915m로 매우 높기 때문에, 산 중턱에 있는 대피소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정상으로 다시 출발하는 일정이 가장 많았다.

그래서 우리가 도전해 볼 만한 등산 코스를 정하고, 그 코스에 있는 대피소를 예약했다.


각자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바로 다음날 새벽 우리는 어둠을 뚫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서울에서 새벽 6시에 출발했음에도 우리는 정오가 다 되어서야 해발 500m 정도에 있는 등산코스의 출발점에 도착했다.

오늘 저녁 6시까지 우리는 해발 1,700m 정도에 있는 대피소까지 가야 했다.

반나절만에 해발 1,200m 정도를 올라가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우리가 코스의 출발점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비를 피하기 위해 모자를 쓰고 가면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 비가 눈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우리는 겨울 산행에 필수템인 아이젠과 등산스틱은 물론이고, 누구나 가지고 있는 등산화도 없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당충전용 초코바 몇 개, 대피소에서 먹을 고기와 컵라면, 갈증해소에 필요한 물, 그리고 의욕뿐이었다.

어느 누구도 1박 2일 코스로 등산을 해본 사람이 없으니, 지리산 또한 동네 뒷산 두세 번 더 오르는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출발부터 고민이었다.

분명 이대로 출발하면 위험할 것 같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등산 코스는 계단으로 되어있지도 않았고, 조금이라도 빨리 대피소에 도착하기 위해 경사도도 급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필요한 장비를 사고 다시 오기에 시간적인 여유는 없었다.

지금 무작정 출발하냐, 아니면 지리산 등산을 포기하고 다른 일정으로 채우느냐 그뿐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꼭 지리산 정상을 찍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도저히 더는 올라갈 수 없게 되면 그때 가서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출발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빗줄기가 거세지자 우리는 서둘러 모자만 뒤집어쓰고 바로 출발했다.


예상대로 경사도는 정말 급했다.

처음에는 10분을 올라가고 10분 쉬기를 반복했다.

우리 모두 공부하느라 체력이 상당히 안 좋을 것 같다고 느끼긴 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아직 해발 100m도 못 올라갔는데, 우리가 오늘 1,200m를 올라가야 한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그때마다 우리는 내년에 합격하려면 이 정도는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고 다독였다.


한걸음 한 걸음씩 올라가다 보니 어느새 해발 1,000m에 도달했다.

처음에는 잠깐이라도 쉬지 않으면 더 이상 못 올라갈 것 같을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다리가 조금씩 적응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말없이 묵묵히 올라가게 되었고, 땀이 식었을 때의 추위가 더 고통스러워서 계속해서 몸에 열을 내야만 했다.


그렇게 우리 몸이 겨울 산행에 적응해나가고 있을 때 우리는 잠시 멈춰야만 했다.

우리가 예상했던 대로 어느새 비는 눈으로 완전히 바뀌었고, 신발이 조금씩 빠질 정도로 눈이 많이 오고 있었다.

자칫하면 굴러 떨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우리는 더 올라갈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내려갈지 결정해야만 했다.

지금 더 올라가면 이따가는 내려오고 싶어도 내려오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당연히 내려오는 게 맞았다.

좋은 장비들을 다 갖춰도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는 상황인데, 아무런 장비도 없는 우리에게는 정말 위험할 수도 있었다.

내년에 꼭 합격하자고 결의를 다지자고 온 건데, 사고라도 당해 뉴스기사에 뜨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하지만 이제 막 우리의 열정이 달궈지기 시작했는데 이대로 포기하면 정말 후회될 것 같았다.

그리고 함께 온 친구들의 의사를 물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공부할 때도 느꼈지만 목표에 대한 열정만큼은 정말 남다른 친구들이었다.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이 친구들과 함께 갈 수 있다는 든든함으로 무장하여 다시 발걸음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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