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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은 복있는 자들

by 그린토마토

202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복있는 자들'은 매력있는 소설이었다. '복있는 자들'은 읽는 내내 불편함을 주며 우리가 현실에서 알게 모르게 인식하고 있었던 차별에 대해 현실적으로 솔직하게 파고들었다.


'충분한 가난은 행운이 되기도 한다. 엄마는 말했다. 정말 다행이지 않니? 우리가 임대주택에 당첨될 정도로 가난해서'로 시작하는 소설은 첫 부분부터 머리를 한 대 치고 시작했다.

'어차피 부자가 될 수 없다면 차라리 아주 가난한 쪽이 좋았다.'

작가는 우리가 보기 싫은 내용이지만 직시해야하는 것을 썼다. 이 소설은 없는 자가 무엇을 희망하는지 보여주는 소설이기도 했다.


'가난하게 사는 걸로 평생 서울 안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 수 있다면 싸게 먹힐 수 있는 건 아닌가. 어차피 난 평생 가난했는데.'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운이 좋았던 거라는 걸 모른다. 어떻게 그렇게 순진하고 무지할 수 있을까? 나는 언니에게 묻고 싶었다. 언니는 노숙자가 일 안하고 화장실 쓰는 건 싫으면서 건물주가 일 안하고 돈 버는 건 괜찮아? 하지만 차마 내뱉지는 못했다.'


'행복은 침대에 누웠을 때 주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옆집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다. 창밖에 정원이 있는 것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개를 산책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한여름에 창문을 닫아놓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시끄러운 개구리들의 비명 따위는 듣지 않는 것이다.'


주인공은 주거급여 수급자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했고 엄마는 다쳐서 급하게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돈은 결국 못 빌렸고 주거급여 수급자에서도 떨어졌다. 게다가 최고 기온이 40도인데 에어컨이 없기에 창문을 열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개구리 울음소리는 왜 그렇게 시끄러운지.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 112동 앞 연못에 개구리를 버린 사람은 아이였다. 그 아이는 112동에 사는 사람들은 진짜 우리 아파트 주민도 아니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고 그 말을 쉽게 했다. 아이의 아빠는 아파트 운영위원회였다.


주인공은 관리사무소에 항의하러 갔지만 에어컨을 켠 사무실에는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관리실 직원은 112동 앞의 연못은 생태연못이고 개구리 때문에 민원이 들어온 적도 없다는 말을 했다.

주인공은 직접 연못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연못 속 비닐봉지 안의 쏟아지는 개구리알을 보며 '모든 사람이 그 개구리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간절히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은 읽는 내내 솔직해서 불편했다. 하지만 소설이 이 세상을 향해 해야할 일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사회의 모습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소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차별의 시선에 대해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2025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복 있는 자들' | 한국일보

https://naver.me/Gvct6C7E




나는 이 소설과 더불어 한 권의 책을 떠올렸다. 그 책은 오찬호 작가의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였다.

'서점의 자기계발 코너에는 가난을 보란 듯이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평균적으로 가난은 보란듯이 이겨내기 힘들다. 비정규직과 같은 노동시장의 차별은 저소득층을 양산하고 이들의 건강, 교육수준, 생활수준 악화로 이어지며, 저소득층 자녀들의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의 형성과 역량의 실현을 막고 이들의 건강, 교육, 생활수준을 재차 악화시키는 악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결국 빈곤이 빈곤을 낳으며 경제적 소득이 낮아 지능을 발달시키지 못한 사람은 자녀의 지능에도 영향을 미쳐 부진이 부진을 낳는다.


이 악순환이 누적되면 빈곤층은 무너진다. 세상에 대한 희망을 거두고 자포자기 상태에 이른다. 더 이상 나빠질 데가 없는 현실에서도 더 추락하는 건 사람이 나태해서가 아니다. 악순환을 내버려 둔 사회의 무자비한 칼부림 앞에 처절하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다르면 인간의 의지가 불타올라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46쪽-


사실, 이 책을 읽을 때도 불편했다. 내가 알고 있던 것은 그럼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하지만 작년에 들었던 오찬호 작가의 강연을 들으며 나 또한 차별에 적응된 사람이라는 것을 깊이 인지했다.


오찬호 작가는 좋은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 하고 물었다. 그리고 좋은 사회란 나쁜 사회의 모습을 찾아야지만 가능하다고 했다. 나쁜 사회에는 좋은 것처럼 포장된 것들이 많다고도 했다.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일상 속 차별과 혐오의 씨앗에 우리가 어떻게 길들여졌는지 성찰해야 하는 거라며 구체적인 절망을 짚어내어야 함을 강조했다.




나는 '복있는 자들'과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를 통해 내 마음속 차별,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했다. 그 불편한 진실들을. 그 불편한 진실들 앞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다져져야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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