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시댁에 갔더니 시어머니가 쪽지를 하나 건네며 말했다.
- 이번 명절엔 큰 조기 사지말고 애들도 잘 먹는 굴비 사는게 좋겠다.
귀퉁이가 찢겨진 쪽지 안에는 전화번호가 하나 적혀 있었다. 시어머니는 TV 홈쇼핑을 보았고 거기에 나온 싸고 질좋은 굴비 오십마리를 본 것이다. 그걸 사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어떻게 주문하는지 몰라 화면에 적힌 전화번호를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쪽지를 잃어버릴까봐 주머니 깊숙히 넣어두었다가 나를 보자마자 반가워 준 것이다. 요즘은 다들 휴대폰으로 링크를 주고받거나 메시지를 보내는 시대이기에 시어머니의 쪽지는 정겹기도 했고 낯설기도 했다.
나는 시어머니가 알려준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상담원은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홈쇼핑 이름이어서 살짝 불안했다. 그래도 상담원이 알려준대로 굴비를 주문했다. 그리고 그 주문은 일주일이 지났지만 계속 배송지연으로 떴다. 결국 이름이 덜 알려진 홈쇼핑은 역시 배송도 잘 안된다며 투덜거렸다.
나는 다시 홈쇼핑에 전화를 걸어 명절 전에는 굴비가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내일쯤 배송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런데 상담원이 말한 내일에도 배송지연이라는 글자만 떴다. 나는 또 답답해서 1:1 문의에 글을 남겼다. 그 다음날에도 답변이 달리지 않았다. 나는 약간 화가 났다.
- 이거 정말 믿어도 될까? 그리고 인터넷에 파는 굴비가 얼마나 많은데 하필 어머니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홈쇼핑 물건에 꽂혀서 나까지 신경쓰이게 하는거야!
낮에 일을 하다가도 굴비가 신경이 쓰여 1:1 문의 답변을 보기 위해 수시로 들어갔다. 성질급한 나는 이러다가 설날전에 도착도 못하겠다는 불안감이 들어 그냥 취소해버렸다. 그러곤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 같은 가격에 굴비 서른마리를 파는 곳에서 다시 주문했다. 굴비 서른마리는 하루만에 배송시작까지 떴다. 답답한 속이 좀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굴비 오십마리를 취소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시어머니는 밝은 목소리로
- 굴비 오십마리 발송했단다. 문자에 그렇게 왔다. 오늘 발송했다고.
나는 시어머니에게 한숨을 쉰 뒤 서른마리가 다시 간다고 했다. 그러자 시어머니는
- 늦어도 굴비가 와서 좋다. 팔십마리 실컷 먹겠네. 돈은 어디로 보내줘야하나? 업체에? 너한테?
하고 해맑게 물었다.
시어머니는 굳이 시장에 가지 않아도 싸고 좋은 물건이 온다는 것만으로 마냥 좋을 뿐이었다. 나는 이미 편리하게 물건 사는 법을 너무 잘 알기에 조금이라도 늦어버리면 조급해졌다. 그리고 그걸 신경쓰고 문제가 생긴건 아닌가 불안감을 갖기도 했다.
주문하는 물건이 내가 생각한 기한까지 오지 않으면 그걸로 문의전화를 하고 확인하고 뭐든 명확한 답을 찾으려 했다. 나는 이미 빠르고 쉽게 이루어지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다. 그리고 그걸 당연하게 여기게 되었다.
팔십마리 굴비를 실컷 먹겠다는 시어머니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부끄러워졌다. 그래, 좀 빠르면 빠른대로 늦으면 늦는대로 실컷 먹으면 되는걸 뭘 그리 안달했는지.
코끝에 고소한 굴비냄새가 벌써 솔솔 나는 것 같다. 입에 침이 고인다. 설명절 내내 집안가득 풍겨나올 굴비굽는소리와 냄새가 기대된다. 이번 명절은 팔십마리 굴비덕분에 더 풍성해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