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저항 삼일운동이 일어나다
삼일운동이 원래는 삼일혁명이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바꾸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원래 삼일혁명으로 불렸는가를 살펴봐야 하는데 삼일혁명으로 불린게 맞다.
김구 선생도 자신의 저서 '석 3.1혁명정신'에서도 제목과 내용에서 혁명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해방되서도 기조가 유지가 되었는데 느닷없이 제헌의회에서 헌법 초안을 수정하는 중에
이승만파가 아닌 민주국민당(민주당 전신) 조국현이 느닷없이 삼일혁명은 적법하지 않으니
삼일항쟁으로 바꾸자는 논의를 낸 것이 국회의사록에 남아 있는 것이 확인 된 것
여기에 이승만 일당이 찬성하며 항쟁을 운동으로 바꾸어 제헌헌법에 그대로 실리게 된 것
그래서, 삼일혁명으로 바꾸자는 논의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민족대표 33인이라고 누가 지정해 준 것은 아니다. 그들도 스스로를 민족대표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언젠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기미독립선언에 참여한 이들을 삼일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로 인식하여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종교 지도자였을뿐이지 민족 대표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은 기미독립선언과 만세삼창을 태화관에서 하고나서 자수를 하고 길어야 고작 3년의 옥고를 보냈을 뿐이지만 탑골공원에서 만세를 시작해서 총독부로 진격하고 전국으로 퍼져서 두달간 항쟁을 하였던 민중들은 200만명이었고, 이중 7,500명의 생명이 넋으로 산화되었다. 그렇게 독립운동을 하다 잡힌 이들은 2만여명으로 최장 15년의 옥고를 치렀다. 누가 과연 지도자인가?
그들은 각지의 고향에서 스스로 자발적으로 뭉쳤으며 스스로 지도자를 뽑아 일본에 대응을 하였다. 그들이 진짜 지도자다.
고종의 인산일이 1919년 3월 3일이다. 인산일이란 태상왕, 태상왕비, 왕,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왕세손, 왕세손빈의 장례일을 이른다. 고종은 당시 태상왕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태상왕으로서 인산일이 적용되었다.
고종의 인산일은 3월 3일 인데다가 고종 독살설이 전국적으로 퍼져서 반일감정이 극대화 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종 인산일을 기해서 독립선언을 하면 그 파괴력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3월 3일은 그래도 왕의 장례일인데 소요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서 3월 2일로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날이 일요일이었다. 앞서 말한바대로 종교지도자들 중 절반이상이 기독교 목사들이었던 고로 일요일은 피하자고 하여 그 전날인 토요일로 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