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 명재상 황희, 졸하다
황희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문신, 재상이다.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字)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이다. 현명함과 냉철한 판단력으로 세종대왕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의 한사람으로서 세종대왕 치세기간 중 역대 영의정 중 최장수로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였다.
고려조에 음서로 관직에 나갔다가 1389년(창왕 1년) 별장으로 과거에 급제했으나, 1392년(공양왕 3년) 고려 멸망 후 은거하였다. 그러나 동료들과 이성계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성균관학관으로 출사하여 조선에서 형조판서, 사헌부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사후 1455년(세조 1년)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에 책록되고, 남원부원군(南原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종묘 세종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성격이 원만하여 존경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났고 관료생활 중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다. 사후 청백리로 규정되어 일반적으로는 청백리(?)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문제도 많았는데
사위가 저지른 살인 옹호**
* * 황희의 사위 서달이 지방 관아의 아전을 몽둥이로 때려 살해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살인 사건은 당시 좌의정이었던 황희가 적극적으로 가담했으며 여기에는 황희 뿐 아니라 의정부 우의정 맹사성, 형조판서 서선, 형조참판 신개, 형조좌랑 안숭선, 사헌부대사헌 조계성까지 연루되어 조용히 은폐된다.
황희는 자신의 사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맹사성과 함께 살인사건의 전말을 축소, 은폐하였으며 직권을 남용해 사건을 조작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에 의심을 품은 사헌부가 사건을 캐나가자 서선의 배후에서 편의를 봐주고 있던 핵심부에는 우의정 맹사성과 좌의정 황희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사실에 격분한 사헌부는 "황희의 간악함이 이와 같아." 며 세종을 흔들었고 세종은 예의상 맹사성과 황희를 파직했다가 불과 7일 만에 다시 기용하는 또 한번의 파격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간통**
** 황희를 더욱 골치 아프게 했던 것은 박포의 처와 간통을 했다는 소문이었다. 이는 간통죄와 살인자 은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박포(朴苞)는 '제1차 왕자의 난'의 공이 자신에게 미흡하게 돌아오자 불만을 품었으나 오히려 이사실을 알게된 이방원에 의해 유배되는데 얼마 후 회안대군 방간을 조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난이 방원의 승리로 끝난후 박포는 방간을 사주했다는 이유로 참수된다.
이 때 박포의 아내는 살인 후 도망나와 황희의 집 마당 북쪽에 토굴을 짓고 그 속에 숨어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황희가 이 때 그녀를 간통하였다는 얘기가 전해졌다. 이는 그의 집 북편의 토굴을 본 누군가에 의해 새어나가 각지로 소문이 확산되었다.
부패**
** 처남들이 법을 어겨 구금될 위기에 처하자 맹렬하게 사간원을 규탄하며 처남들을 구한 일화, 아들 황치산이 빼앗긴 과전을 돌려달라고 청원하기도 하고, 첩과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 황중생이 죽을 죄를 범하자 조씨로 변성하게 하여 자기 자식이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승려, 말단직원, 지방수령 등으로부터 끝도없이 금품을 받고 관직을 내주어 ‘황금대사헌, 황금재상’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등 좋지 않은 물의를 빚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종대왕의 신임으로 가벼운 처벌을 받거나 복직했다.
여러가지 비리와 이권 청탁의 의혹이 있었음에도 국가 미래를 내다보는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 세종은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임했다.
세종의 절대적 신임과 스스로의 보여주기식 쇼잉으로 그의 사생활과는 별도로 명재상으로 활약하며 세종의 오른팔 역할을 하다가 1452년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 도대체 이런 그가 어떻게 청백리의 대표 명사가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