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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오늘사건] 1970년 4월 8일

와우아파트 붕괴사고가 일어나다

by 나그네
20250401_021606.png 와우 아파트는 당시 서울 시장 김현옥이 박정희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만든 걸작이었다

6.25전쟁 이후, 1950년대 후반기에서 1960년대에 걸쳐 서울의 인구수가 급증한 데 따라 무허가 불량건물의 수도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무허가 건물의 정리를 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서울 시장이던 김현옥 시장은 각 구청에 지시하여 무허가 건물 전수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13만 6,650동이 집계되었다. 김현옥 시장은 4만 6,650동을 이른바 양성화라는 이름으로 현지 개량하고, 나머지 9만 동은 시민아파트를 건립하여 아파트에 주민들을 이주시키거나 경기도 광주군(현재의 경기도 성남시)에 대단지를 조성하여 이주, 정착시킨다는 방침을 세우고, 1969년 1년 동안 32개 지구에 406동 1만 5,840가구 분의 아파트를 건립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와우 아파트 테이프 커팅식을 하고 있다. 옆에 있는 이가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

와우아파트는 서울특별시가 와우산 일대에 건설한 시민아파트였다. 가파른 와우산 중턱에 아파트를 지은 이유는 김시장이 자신의 업적이 청와대에서 일부러 잘 보이도록 산 중턱에 짓도록 한 것이다. 와우 아파트는 몇 개의 건설업체가 나누어 지었는데 이 중 13~16동은 (주)대룡건설이라는 업체에서 맡았다. 대룡건설은 이걸 박영배라는 업자에게 하청을 주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무면허 업자였다는 것. 거기에 공사비는 한동에 5층짜리 아파트를 1100만원 정도로 지으라고 했으니 날림공사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설계시 철근 70개 써야할 기둥에 5개 철근만 쓰는 등 설계, 건축 자체에서 문제가 발생한 부분이 많다. 더군다나 빈민층 위주의 아파트라서 바닥하중 280kg정도를 견디게 만들었는데 브로커들 개입으로 입주권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 빈민층은 입주권을 중산층에게 팔게 되고, 중산층들 가재도구 무게가 900kg를 넘게되니 문제점은 이미 초기부터 안고 있었던 부분이다.

와우아파트 단지를 걷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 그리고 그 옆의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

거기다가 고작 6개월만에 아파트를 완성하느라 건축물을 세우는 데 필수적인 지반 공사를 전혀 하지 않았다. 애초에 건물을 어떻게 짓는 지조차 모르는 작자들이 건설을 맡았으니 어떻게 될지 뻔할 뻔자인 것.

QBW6PAARSZAFRHCSTZITN75TNA.jpg 와우 아파트 15동이 통채로 무너져 버렸다

그 결과 준공 4개월 만인 1970년 4월 8일 오전 6시 40분 경 15동 아파트가 무너져 사망 33명, 부상 38명의 인명피해가 일어나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불도저'라고 불리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사직했고 관련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었다.

다운로드.jpg 와우아파트가 철거된 곳에 설치된 와우공원

15동 붕괴가 일어난 지 이레 후 문제의 시공업자가 시공한 13, 14, 16동도 철거가 이루어졌다. 콘크리트 질이 너무 떨어져 철거하는 데도 애먹었다고 한다. 이후 1976년과 1984년, 1988년, 1989년 네 차례에 걸쳐 차례로 철거되고 1991년까지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4개 동(3, 4, 5, 가)도 결국 철거되고 터는 와우공원으로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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