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만행으로 제암리 학살사건이 벌어지다
발안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은 제암리 감리교회 김교철 전도사를 중심으로 유학자, 천도교 지도자 들이 모여 준비를 하였고, 3월 31일 정오 이정근이 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장터에 모인 천 여명이 따라 불렀고,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위협 사격과 군중의 투석이 이어졌다.
아리타 도시오 육군 헌병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가 제암리에서 15세 이상 제암리 주민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했다. 만세 시위 진압 과정에 대한 사과가 그가 내세운 명분이었으나 너무나도 뻔한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제암리 개신교인들의 명단을 확보한 아리타는 교회당에 사격을 시작하는 동시에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당초 알려지기로는 일본군이 교회당 안에 있던 사람들을 못 나오게 하려고 문에 못질을 했다고 하나 정황적으로는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이 있는 걸로 보면 못질은 하지 않은 듯하다.
한 여인이 안고 있던 아기라도 살리려고 창문 너머로 던지자 밖에 있던 일본군인이 떨어지는 아기를 향해 총검을 내질러 아기조차 잔혹하게 학살하였다는 목격담이 있을 정도로 매우 잔혹하였다. 22명이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으며 3명이 교회당에서 탈출하던 중 2명은 사망하고 한 명은 산으로 피신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다음날 일부 군인들은 고주리로 가서 화성 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홍렬 일가족 6명도 살해했다.
현재도 남아 있는 제암리 교회에선, 영상물과 교육자료 등을 통해 이 외에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의 내용을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일제의 잔혹함이 드러난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 날이 1919년 4월 15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