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청일전쟁이 터지다
청일 전쟁(淸日戰爭)은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1894년 7월 25일부터 1895년 4월까지 벌인 전쟁이다. 중국에서는 갑오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갑오전쟁(甲午战争, 甲午戰爭), 일본에서는 일청전쟁(日清戦争), 서양에서는 제1차 중일 전쟁(First Sino-Japanese War)이라고도 부른다.
변법개화파가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여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으나, 3일만에 청나라 군사고문 원세개의 개입으로 반란은 진압되었다. 청나라와 일본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듬해 1885년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1894년, 갑신정변을 주도한 친일 개혁세력인 김옥균이 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암살당하였다. 일본은 그 유해를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했으나 청나라가 이를 막고 청나라의 전함에 실려 조선으로 보냈고, 조선에서 그는 다시 능지처참당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를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상황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봉기에 조선 정부가 청나라 정부에 지원병을 요청하였을 때에 더욱 심해졌다.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 사실을 일본 정부에 알렸고, 2,800명의 병력을 보냈다. 일본은 병력 8,000명을 조선으로 보냈다. 이들은 조선의 항의에도 1894년 6월 9일 이후 인천에 상륙, 7월 23일 고종 임금이 거하는 경복궁을 점령하였고,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조선의 내각을 김홍집, 박정양, 민영달 등의 친일 인사로 교체하여 갑오개혁을 실시하였다. 청나라는 조선의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양국간의 분쟁이 시작되었다.
1894년 7월 25일, 아산 근해를 순찰하던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済遠)과 군함 광을(広乙)과 마주치며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895년 3월 26일, 일본군은 타이완 부근의 펑후 제도를 희생자 없이 점령하면서 청일전쟁은 막을 내린다.
이후 청나라의 요청으로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 인하여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 냥(兩)을 일본에 지불하였으며, 랴오둥 반도·타이완, 펑후 제도 등을 할양하였으며,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하였다.
사실상 병자호란 이후 청과의 군신관계에 메어있던 조선은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면서 사실상 자주독립국이 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