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화. 아무도 모르는

by 나그네
cover.png

정 관장과 한가람의 만남이 있기 며칠 전. 한가람은 시내 대형 빌딩 앞 벤치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취업 포털 사이트였다. 그녀는 닫힌 입사 지원 페이지들을 손가락으로 연달아 넘겼다. '대졸 이상', '토익 900점 이상', '관련 경력 3년 이상'. 그녀의 눈은 '고등학교 졸업'이라는 단어가 요구되는 지원서를 찾았지만, 검색 결과는 단 두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04.jpeg

그녀는 화면을 끄고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옆을 지나가던 양복 차림의 회사원이 서류 봉투를 떨어뜨렸다. 한가람은 재빨리 몸을 숙여 서류를 주웠다.


"고맙네."


회사원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는 한가람의 낡은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가람은 아무 말 없이 벤치에 다시 앉았다. 그녀는 무릎을 덮고 있던 낡은 코팅지를 펼쳤다. 종이 위에는 '고수익 일자리' 목록이 출력되어 있었다. 식당 서빙, 택배 상하차, 그리고 '재개발 현장 일용직'이 가장 높은 시급을 자랑했다.


한가람은 병실 창가에 기대어 섰다. 늦가을의 햇살이 창을 넘었지만, 병실 안은 여전히 차가웠다. 링거줄이 늘어진 어머니의 팔은 가늘었다.

08.jpeg

한가람은 낡은 서류 봉투에서 병원비 청구서를 꺼냈다. 숫자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청구서 모서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느리게 쓸어 내렸다. 단지 풀어야 할 수학 문제처럼 보였다.


어머니가 힘없이 기침했다. 한가람은 찬물에 헹군 깨끗한 수건을 꺼내 어머니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어머니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려 했지만, 얼굴의 근육이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나가지 마, 가람아."


어머니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가람은 고개를 저었다.


"응. 나갈 일 없어."


병실을 나선 그녀는 응급실 방향으로 걸었다. 심야, 응급실 앞은 어두웠고 간혹 불빛만이 바닥을 비출 뿐이었다.

back.png

그때, 긴 생머리의 여인이 피범벅이 된 남자를 질질 끌며 응급실 앞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여인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남자를 문 바로 앞에 내버려 두었다. 남자는 이미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있었다.


여인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 모든 과정이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한가람은 이 장면을 벽에 기대 무심하게 지켜보았다.


그녀의 시야는 쓰러진 남자의 처참한 부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여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왜 사람을 저렇게까지...'


이대로 두면 남자의 생명이 위험하다는 냉정한 사실만이 그녀의 머릿속에 남았다.


'살리려면, 지금 당장.'


한가람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쓰러진 남자의 멱살을 잡고, 마치 짐짝을 옮기듯 가장 짧은 경로로 그를 응급실 문턱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정확히 30초 후, 피투성이의 상처와 부서진 몸을 마주했지만, 그녀는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을 마친 것으로 충분했다. 그녀는 미련 없이 응급실 문을 뒤로하고 나왔다.


그녀는 다시 한번 '고수익 일자리' 목록을 펼쳤다. 어머니의 연장 입원 서류와 늘어난 청구서를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이제 가장 고되고 위험한 노동뿐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가장 높은 금액이 적힌 '재개발 현장 일용직'에 멈췄다.


keyword
이전 01화1화 넘어지면 아프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