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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사건] 660년 8월 20일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전사하다

by 나그네

660년 당군이 덕물도에 상륙하면서 나당 연합군의 본격적인 백제 공격이 시작된다. 백제 조정의 전략은 성충, 흥수의 말대로 기벌포와 탄현에서 당, 신라군을 동시에 모두 저지하려는 전략과 당의 상륙을 허용하지만 좁은 길목에서 당군에게 공세를 가하려는 전략이 맞서게 된다. 백제 조정은 성충과 흥수의 안 대신, 조공으로 신라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한편, 수도 주력군으로 기벌포에 상륙해서 백강을 거슬러 오르는 당군을 요격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김유신 휘하 신라군 5만이 탄현(대전광역시 식장산 동쪽 부근)을 넘어 충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자 백제 조정은 달솔 계백, 상영과 좌평 충상에게 5천명의 군사를 주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저지하게 한다.


그런데 말이 황산벌이지, 실제 계백은 산 위에 진을 치고 싸웠다. 상식적으로도 10배가 넘는 적과 허허벌판에서 교전하면 이건 이길 수가 없다.

將不能料敵,以少合衆,以弱擊強,兵無選鋒,曰北

장수가 적을 헤아리지 못하고, 적은 수로써 대병력에 맞서고, 약으로 강을 치고 군대에 정예병이 없으면 말하노니 패한다. [손자병법, 지형편]

계백은 험준한 곳에 3개의 진영을 세워 신라군의 공세에 대비한다. 이 3개의 영은 각각 현재의 황령 산성, 산직리 산성, 모직리 산성으로 추측되고 있다. 계백이 열세에 있는 군을 셋으로 나눈 이유는 신라군이 산직리 산성을 우회하여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는 한편, 세 산성은 어느 한 곳에 공격을 집중할 경우 배후를 노출시키는 형세였으므로, 지세를 활용하여 병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군을 분산시킨 약점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추가로 깃대봉-국사봉-귀명봉 주위의 보루에 소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신라군의 우회를 감지하는 방식의 반원형 진을 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 산성은 우리가 아는 석성이 아니고 작은 토성에 불과하다. 따라서, 백제군은 구릉지대의 작은 토성과 목책을 세워 신라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식의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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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는 상대방이 반드시 산성으로 진격해서 싸울 때 가능한 전략이다. 신라군은 굳이 힘들여 산성으로 가서 공성전을 해야할 필요가 없었다. 원래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을 함락하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괜히 백재군과 교전을 할 이유가 없었다. 도리어 신라와 반드시 싸워야 하는 상대는 백제군이었다.

처자식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발한 계백은 전투가 시작하기 전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吳)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라고 말하며 사기를 올리려 했다.

그리고, 660년 8월 20일 백제 멸망을 위한 전투 황산벌 전투가 발발하게 된다.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4번 모두 신라의 공격을 패퇴시켰다. 이에 신라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당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화랑 반굴과 관창을 백제군을 향해 돌격시킨다.


반굴은 처음 돌격 때 전사하고, 관창은 한번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돌격하여 결국에는 사로잡히고, 계백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보낸다. 이에 분노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친다. 그 전까지 4차례의 전투로 병력이 크게 소모된 백제군은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끝내 버텨내지 못했다. 3영이 붕괴되고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 명은 사로잡혔으나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천은 전멸한다.


전쟁은 8월 20일-21일에 걸쳐 벌어졌으나 실질적으로 백제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한 시간은 8월 20일 하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방어진지도 아닌 3개의 산성에서, 당군과의 합류를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나왔을 신라군을 상대로 4차례나 승리한 것은 그만큼 계백의 지휘가 탁월했고 백제군이 분전이 눈부셨다는 방증이다.


계백은 황산벌에서 전사하고 백제군은 마지막 죽을 힘으로 버텼으나 끝끝내 패하고 신라군이 사비성으로 진격한 날은 이튿날인 8월 21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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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년 백제의 상황은 전국이 온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수도권만 격파당헀을 뿐 이후 일본에서 돌아온 풍왕자와 함께 3년간 나당연합군에 항전한 기록이 있다. 이를 봤을 때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마지막 불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의 시작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계기가 계백의 전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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