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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의 오늘사건] 1866년 8월 21일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다

by 나그네

조선왕조실록 청 동치(同治) 5년, 고종 3년 7월 계미일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平安監司朴珪壽狀啓:

평안 감사(平安監司) 박규수(朴珪壽)의 장계(狀啓)에,


"平壤府所泊異樣船, 益肆猖狂, 轟砲放銃, 殺害我人。

"평양부에 와서 정박한 이양선(異樣船)에서 더욱 미쳐 날뛰면서 포를 쏘고 총을 쏘아대어 우리 쪽 사람들을 살해하였습니다.


其所制勝之策, 莫先於火攻, 一齊放火, 延燒彼船。

그들을 제압하고 이기는 방책으로는 화공 전술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므로 일제히 불을 질러서 그 불길이 저들의 배에 번져가게 하였습니다.


彼人崔蘭軒、趙凌奉, 跳出船頭, 始請救生。

그러나 저쪽 사람들인 최난헌(최난헌 崔蘭軒 : Thomas, Robert Jermain)과 조능봉(趙凌奉 ; 청국인 조리사)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비로소 목숨을 살려달라고 청하였습니다.


卽爲擒捉, 縛致岸上矣。

즉시 사로잡아 묶어서 강안으로 데려왔습니다.


軍民憤忿, 齊會打殺, 其餘殲滅無遺。

이것을 본 군민(軍民)들이 울분을 참지 못해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죽였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남김없이 죽여버렸습니다.


全城騷擾, 始可鎭定。

그제야 온 성안의 소요가 비로소 진정될 수 있습니다.


兼中軍鐵山府使白樂淵、平壤庶尹申泰鼎, 親冒銃砲, 心力俱殫, 畢竟勦滅, 可歸全功。

겸 중군(兼中軍)인 철산 부사(鐵山府使) 백낙연(白樂淵)과 평양 서윤(平壤庶尹) 신태정(申泰鼎)은 직접 총포탄이 쏟아지고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싸움으로써 결국 적들을 소멸시켰으니 모두 그들의 공로라고 할만 합니다.


施以襃賞之典, 恐未知如何?

포상(褒賞)의 특전을 베풀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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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근대사 시간에 베우는 흥선대원군이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하게 된 계기 중의 하나의 사건인 제너럴셔먼호에 대한 기록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한 사료는 꽤 많으나 남아 있는 자료들은 대부분 조선측의 기록이다. 반면 제너럴 셔먼호측의 입장을 담은 사료는 많이 없다. 왜냐하면 제너럴 셔먼호의 생존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서 양측의 충돌 경위를 따지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이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누구인가를 가름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생존자가 있다면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주장했을 가능성도 크지만, 당시 제국주의 열강들이 침략근거로 삼는 종교 선교에 대한 박해를 무조건 선전포고라며 기록한 걸 봐도 다를 게 없기 때문.


당초 제너럴 셔먼호에 대한 조선측의 입장은 다른 이양선의 경우와 같이 부드럽게 대접하여 돌려 보내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요구에 따라 평안도 관민들은 두 차례에 걸쳐 쌀, 고기, 계란, 채소, 땔감 등을 대주었다. 그러나 조선측에서 수교만큼은 거절하였고, 이에 반발한 제너럴 셔먼호 측에서 중군 이현익을 납치했다. 이는 모든 기록에서 일치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 주목해야 할 기록이 '패강록'이다. 이 책은 이현익의 아들 이흥근이 쓴 것이다. 이에 따르면 문정에 나선 진사 안상흡이 만약의 경우 제너럴 셔먼호를 퇴치할 방안을 적은 문서를 든 채 배를 타고 이현익에 앞서 접근했다가 제너럴 셔먼호에서 띄운 소청선에게 그 문서를 빼앗긴다. 그리고 제너럴 셔먼호측에서 그 문서를 통해 조선측에서 선원들을 회유해 상륙시킨 뒤 몰살하려는 계획을 알아내고 이현익이 탄 배를 나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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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흥선 대원군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서양에 대한 배척을 나타내더니 같은 해에 일어난 병인양요를 계기로 양이정책(攘夷政策)인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더 한층 강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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