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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치유 Jan 13. 2024

씻을 수 없는 죄

[고전] 가와바타 야스나리, <천마리 학>을 읽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사진. 출처 - 나무위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의 소설가로, 1899년에 태어나 1972년에 그 끝을 맞이하였다. 1968년에 설국을 통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일본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다. 아름답고 유려한 문장으로 유명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필자가 그의 <천마리 학>을 읽으면서 계속 일본의 다다미에 앉아서 차 한 잔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깔끔하고 아름다운 문장들을 잘 쓴다는 인상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자살로 그 삶을 끝마쳤다고 들었다. 그래서인지 <천마리 학>에서도 결말에 후미코의 자살에관한 묘사가 있는데, 전혀 잔혹하거나 절망스러운 느낌이 없이 그저 담담한 어린아이를 통해 설명한다.


 어쩌면 저자가 자살에 대해 생각하는 이미지는 그 정도의 느낌이 아닐까. 물론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저 하나의 추측일 뿐이다.


관계의 대물림 - 사랑

  <천마리 학>은 사랑의 한 측면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기쿠지의 아버지의 지카코와의 관계, 그리고 오타 부인과의 관계가 혈연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물림되는 것만 같은 전체적인 작품의 분위기는 이를 사랑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물론 사랑에 대한 묘사는 몇 가지 존재한다. 예를 들면 초반부에 기쿠지가 아버지의 부정을 상징하는 것과 같아서 싫어하던 찻잔이 이후 후미코와 만났을 때는 아버지와 오타 부인의 관계를 상상하면서도 다르게 말한다.

 아름다운 영혼이 나란히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189)

 기쿠지는 이를 “아름답군”이라고 직접 말하기까지 하며,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는 관계에 대한 성스러움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나무라 아가씨에서도 기쿠지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간접적 서술을 알 수 있다. 기쿠지는 이나무라 아가씨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지만, 천 마리 학만은 선명하게 기억난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건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타 부인의 경우에는 명확하게 얼굴을 기억하며, 그녀의 딸인 후미코에게서도 같은 여자를 느낄 정도로 선명한 이미지를 갖는다. 즉 기쿠지는 분명 더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나무라 아가씨보다 오타 부인과 후미코에게 강한 애정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특히 “더 좋은 시노가 있는걸요.”라는 후미코의 말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기쿠지와 같이 높은 집안의 자제가 더 좋은 시노와 같은 이나무라 아가씨를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이 말에서도 기쿠지가 후미코 자신을 선택했음을, 즉 사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직접 서술되지는 않아도 지카코, 그리고 오타 부인도 기쿠지에게서 그의 아버지에 대한 선명한 이미지를 기억하는 듯하다. 이렇듯 기쿠지가 명확하게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는 여성들은 충분히 사랑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시노 : 한국으로 치면 고려청자, 조선백자같이 토기의 한 종류. 흰 유약을 두껍게 입힌 부드러움이 있는 아취가 풍부한 도자기이다. 출처 : 고원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천 마리 학(千羽鶴)』연구>, 2007


관계의 대물림 - 죄


 하지만 작품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작품에서 말하는 사랑에는 무언가 한 가지 의미가 더 섞여 있는 것만 같다. 필자는 그것을 다음 문장에서 찾았다.

 죄였다면 영영 지워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슬픔은 지나가 버리죠. (178)


 슬픔은 감정이다. 만약 본문 전체에서 사랑이라는 의미가 단순한 감정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슬픔과 다를 바 없이 지나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타 부인과 지카코는 기쿠지에게서 그의 아버지를 ‘겹쳐보았고’, 기쿠지는 후미코에게서 오타 부인을 ‘겹쳐본다’. 개인의 죽음 이후에 물려받았다는 것은 분명 이 사랑이 슬픔과 같은 지나가 버리는 감정이 아니라, 영영 지워지지 않는 죄임을 의미한다.


 죄는 그 단어 자체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불교에서 죄를 저지르면 인과율에 따라 업(karma)이란 결과를 쌓는다. 부처가 되면 업을 모두 청산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일반 인간은 남은 업을 청산하기 위해 환생을 한다. 즉 불교에서의 죄는 환생 이후에도 이어지는 연속성을 가진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환생이 아닌 아들에게서 그 관계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일상적으로 죄의 대물림을 인지하고 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을 보았을 때 ‘부모가 그러니 자식도 그러하지’라는 말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가?


 이러한 죄의 속성을 소설 속의 인물 사이의 관계에 도입하면 꽤 많은 의문들이 해결된다. 첫 번째 의문은 주인공과 후미코 간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왜 주인공은 이나무라 아가씨를 직접 만났음에도 천 마리 학의 이미지만 기억한 반면, 후미코에게는 관계를 가질 정도까지 끌렸을까?


 이는 단순히 사랑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부모인 오타 부인의 죄를 후미코가 물려받았고, 그 전에는 기쿠지가 아버지의 죄를 물려받았기에 상대에게서 그 부모의 죄를 느낀 것이라고 설명하는 쪽이 더 인과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죽음, 그것이 소생의 희망


 이 점은 기쿠지가 이나무라 아가씨와 직접 만났을 때 “어둡고 추한 막에 둘러싸여 있는 듯 견딜 수가 없었다.”라고 말한 점에서도 그가 아버지의 죄를 짊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죄의 속성을 도입하면 결말에서 후미코의 자살도 설명할 수 있다.


 후미코는 기쿠지와 관계한 바로 다음 날 여행을 갔다고 하지만, 이를 설명하는 화자는 열두세 살쯤 된 소녀이다. 그리고 그녀는 상세한 내용을 어머니가 설명해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후미코의 자살을 정리한 후 아이에게 ‘여행’으로 설명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후미코는 결국 오타 부인이 죄를 견디지 못 하고 자살한 것처럼, 그녀도 죄를 이어받아 자살을 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쿠지의 심리적 변화가 눈에 띈다. 이나무라 아가씨와 직접 만났을 때에는 얼굴에 대해 명확히 기억하지 못 하고 천 마리 학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후반부에서 그는 후미코의 자살을 알려준 소녀의 눈썹이 엷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기쿠지의 변화는 필자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학업이든 일이든, 무언가를 위해서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친구들의 연락에 더 늦게 답장하고, 만나도 계속 일이 생각나서 제대로 놀지 못했다.


 무언가 자신을 옭아매는 것이 있을 때에는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서 새로운 정보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라서 이렇게 기쿠지가 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후미코가 “소생의 희망”을 기쿠지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이라도 생각한다. 결국 후미코의 자살로 주인공을 압박하던 모든 죄의 연결고리가 청산되었고, 그 결과 주인공 기쿠지도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작품 내에서도 다른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후미코의 시노 찻잔이 300~400년간 계속 이어져왔다는 설명은 관계의 연속성이 아주 오랫동안 대물림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후미코의 시노 찻잔을 깨부순 순간, 그녀의 자살을 통해서 죄의 대물림이 끝나는 결말이 나올 것임을 이미 보여준 것과 다름이 없다.


 업의 소멸, 그리고 이어지는 죄의 예속의 끝. 결국 저자는 죄의 연결고리가 죽음으로 해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해가지 않는 의문점

책의 표지. 천마리 학 외에도 두 편의 소설이 더 있다. 개인적으로 이것 외에도 이즈의 호수를 추천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점이 한 가지 생긴다. 구라모토 지카코는 오타 부인을 증오하지만, 결국 살아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왜 그녀는 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해석으로는 정확히 답을 내리기가 힘들다. 한 가지 차이는 그녀가 오타 부인과 달리 한두 번의 관계만을 가졌을 것이라는 점인데, 단순히 횟수의 차이에서 죄의 깊이의 차이가 일어났다고 보는 것은 어렵기에 이런 차이는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다음에 다시 읽을 때에는 지카코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곁들여서 함께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보아야 겠다.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게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별점 : ★★★★☆ : 읽기 어렵거나 하진 않았지만 곱씹을 수록 생각할 거리가 많아지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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