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해피밸리!

by 자연치유

12/28(수).


일전에 살던 곳에 특이한 장소가 있었다. 커다란 상가 건물이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갈 만한 식당 같은 장소가 없어서 일주일 내내 사람이 근처에 많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일요일 점심, 그것도 딱 특정한 시각만 되면 안에서 중년 남성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것도 굉장히 엄숙한 표정으로 말이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처음에는 교회인 줄 알았다. '교회 중에서 십자가가 없는 경우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부모님께 듣고서야 그곳의 지하에 경마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오는 사람들이 왜 중년 남성들 위주인지, 왜 다들 엄숙한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경마가 도박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포츠로써 그 가치를 크게 가지기도 한다. 특히 홍콩은 그 열정이 더해서 아예 경마장으로 가는 전철역을 만들어 경마하는 날에만 운영할 정도이다. 이런 곳이 아니라면 언제 경마장을 남들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체험해보겠나 싶어서 홍콩섬에 있는 해피밸리 경마장을 찾아가 보았다.




해피 밸리 경마장


경마장에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신분증(나에겐 여권)과 혹시 모를 학생증 정도를 챙겨갔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 한 점이 발목을 붙잡았는데, 바로 경마장 정류장 앞에서 산 물.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밖에 두고 가야 했다. 내가 생각해 볼 때 이유는 두 가지 같은데, 하나는 철저히 관리하는 말에게 괜히 이상한 음식을 던지는 관객이 있으면 그로 인해 말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고 둘은 내부에서 파는 여러 간식거리 - 치즈 감자튀김, 맥주 등을 구매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안에 들어가니 눈부신 빛들이 내 앞을 가득 채웠다. 왼쪽에는 위에서 경마장을 관람할 수 있는 건물이 크게 서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경기장이 울타리 너머로 있었다. 건물 바깥 전체에 황색 조명이 쫙 깔려있는데 하늘이 어두울 시간이라 조명이 더 눈부시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하늘이 어두워도 경마장 안에서 하늘을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왼쪽 - 오른쪽 - 전체


우리가 조금 일찍 와서 처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경마 경기가 시작할 무렵이 되니까 빠르게 사람들이 차고 들어왔다. 특히 해피밸리 경마장에는 마권을 사지 않아도 경기장 안에서 관람할 수 있으니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경마장 울타리 앞에 서서 관람하러 대기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경마장과 연결된 짧은 트랙으로 말이 한 마리씩 들어섰다. 경기를 대비하고자 걸을 수 있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팬들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람 키보다 거대한 말을 보니까 신기했다. 솔직히 동물원이나 제주도에서 조랑말 체험처럼 타본 경험은 있지만, 그때 봤던 말보다 덩치도 크고 위압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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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경마. 처음엔 어디서 시작하는 줄도 몰라서 그냥 간판에서 달리는 말을 지켜보기만 했다. 말에는 각각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솔직히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번호만 보고 간신히 분별할 수 있었다.


경주 방식은 트랙을 딱 한 바퀴만 도는 경주였는데, 2번째 코너를 돌고 나서 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육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정말 격렬하게 뛰는 말들이 내는 소리는 땅을 울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하는 소리. 중세 시절에 기마병이 공포의 상징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이유가 이런 소리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윽고 눈앞을 말들이 지나가는데, 자동차에 익숙해진 내 눈도 말들이 지나갈 때 잔상이 보일 정도였다.


후반부에 조악한 휴대폰 녹음에도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경마 경기를 처음 눈앞에서 보니까 괜스레 경마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솔직히 일반인인 내가 보기에도 치열해 보이는데 거기에 축구, 농구 같은 스포츠에 비하면 룰도 간단하고 순식간에 끝나니 말이다.


"중요한 건 경기를 준비하는 과정이 많은 분께 좋게 영향을 끼치고 또 경쟁하는 모습이 영감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스포츠로서 가장 중요한 의미다"라는 페이커의 말. 솔직히 경마가 도박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오늘의 경마장 관람은 완전히 신선한 경험으로 내 안에 자리잡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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