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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치유 Apr 19. 2024

달려라! 해피밸리!

 12/28(수).


 일전에 살던 곳에 특이한 장소가 있었다. 커다란 상가 건물이었는데,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갈 만한 식당 같은 장소가 없어서 일주일 내내 사람이 근처에 많이 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일요일 점심, 그것도 딱 특정한 시각만 되면 안에서 중년 남성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것도 굉장히 엄숙한 표정으로 말이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처음에는 교회인 줄 알았다. '교회 중에서 십자가가 없는 경우도 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부모님께 듣고서야 그곳의 지하에 경마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오는 사람들이 왜 중년 남성들 위주인지, 왜 다들 엄숙한 표정으로 말이다.


 하지만 경마가 도박으로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포츠로써 그 가치를 크게 가지기도 한다. 특히 홍콩은 그 열정이 더해서 아예 경마장으로 가는 전철역을 만들어 경마하는 날에만 운영할 정도이다. 이런 곳이 아니라면 언제 경마장을 남들 눈치 안 보고 편하게 체험해보겠나 싶어서 홍콩섬에 있는 해피밸리 경마장을 찾아가 보았다.




 해피 밸리 경마장


 경마장에 들어가는 데에 필요한 신분증(나에겐 여권)과 혹시 모를 학생증 정도를 챙겨갔다. 그렇지만 예상치 못 한 점이 발목을 붙잡았는데, 바로 경마장 정류장 앞에서 산 물.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밖에 두고 가야 했다. 내가 생각해 볼 때 이유는 두 가지 같은데, 하나는 철저히 관리하는 말에게 괜히 이상한 음식을 던지는 관객이 있으면 그로 인해 말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고 둘은 내부에서 파는 여러 간식거리 - 치즈 감자튀김, 맥주 등을 구매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안에 들어가니 눈부신 빛들이 내 앞을 가득 채웠다. 왼쪽에는 위에서 경마장을 관람할 수 있는 건물이 크게 서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넓게 펼쳐진 경기장이 울타리 너머로 있었다. 건물 바깥 전체에 황색 조명이 쫙 깔려있는데 하늘이 어두울 시간이라 조명이 더 눈부시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하늘이 어두워도 경마장 안에서 하늘을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였다.


왼쪽 - 오른쪽 - 전체


 우리가 조금 일찍 와서 처음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경마 경기가 시작할 무렵이 되니까 빠르게 사람들이 차고 들어왔다. 특히 해피밸리 경마장에는 마권을 사지 않아도 경기장 안에서 관람할 수 있으니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경마장 울타리 앞에 서서 관람하러 대기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경마장과 연결된 짧은 트랙으로 말이 한 마리씩 들어섰다. 경기를 대비하고자 걸을 수 있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팬들을 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람 키보다 거대한 말을 보니까 신기했다. 솔직히 동물원이나 제주도에서 조랑말 체험처럼 타본 경험은 있지만, 그때 봤던 말보다 덩치도 크고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경마. 처음엔 어디서 시작하는 줄도 몰라서 그냥 간판에서 달리는 말을 지켜보기만 했다. 말에는 각각 다른 이름이 있었는데, 솔직히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태로 번호만 보고 간신히 분별할 수 있었다.


 경주 방식은 트랙을 딱 한 바퀴만 도는 경주였는데, 2번째 코너를 돌고 나서 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육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는데, 정말 격렬하게 뛰는 말들이 내는 소리는 땅을 울리는 듯했기 때문이다. 두두두두, 하는 소리. 중세 시절에 기마병이 공포의 상징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 이유가 이런 소리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윽고 눈앞을 말들이 지나가는데, 자동차에 익숙해진 내 눈도 말들이 지나갈 때 잔상이 보일 정도였다.


후반부에 조악한 휴대폰 녹음에도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경마 경기를 처음 눈앞에서 보니까 괜스레 경마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솔직히 일반인인 내가 보기에도 치열해 보이는데 거기에 축구, 농구 같은 스포츠에 비하면 룰도 간단하고 순식간에 끝나니 말이다.


 "중요한 건 경기를 준비하는 과정이 많은 분께 좋게 영향을 끼치고 또 경쟁하는 모습이 영감을 일으킨다면 그것이 스포츠로서 가장 중요한 의미다"라는 페이커의 말. 솔직히 경마가 도박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오늘의 경마장 관람은 완전히 신선한 경험으로 내 안에 자리잡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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