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갯속에 서 있는 막막함과 답답함을 느낀다. 이것이 지속될 때면 두려움을 경험한다. 가슴 중앙 무언가 딱딱한 덩어리가 느껴지며 불쾌감을 느껴진다. 이 불쾌감은 불안이란 걸 난 알 수 있다. 상담사이지만 내 불안은 어쩌지 못할 때가 많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내담자들에게 조언했던 불안관리법이란 걸 나도 해본다. 호흡하고, 감정을 글로 써보고, 아주 가끔은 진저리 치도록 단 걸 먹기도 한다. 이런 방법이 통할 때면 다행인데 아무런 효과가 없으면 불쾌감이 지속되고 무기력해진다.
최근 읽은 명상 관련 책에서는 ‘포기하고 돌아설 때’ 평안함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반가운 글이었다. 방법이 있다는 희망을 보았고 기대를 해본다. 문제는 포기하고 돌아서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다. 사실,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포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 일어나려던 희망과 기대를 주저앉힌다.
포기해야 할 것이 성공한 상담사라면, 그걸 어떻게 하는 게 포기하는 거지? 원하지 않으면 되는 걸까? 되려 하고 기대하지 않는 것? 그럼 난 무엇을 해야 하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저 이 자리를 지키고 주어진 것을 하는 건지…. 이건 아닌데... 내 안에서 작은 의구심이 인다. 어쩌면 부정하는지도 모르겠다. 내 본질을 드러내면 해결되는 걸까?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문득 ‘나는 평안함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언젠가 경험했던 '그것'을 다시 경험하고 싶은 나.
본래의 모습을 알아차린다는 건, 내가 무언가를 가지고 무언가가 되어도 본래의 모습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를 가지고, 무엇이 되려 하는 것이 내 본래 모습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가능하다. 내가 가지려 하고 되려 하는 것이, 나에게 본래 가지지 못하고 되지 못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결핍을 채워야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 것과 같다. 내가 보는 나는 어쩌면, 만들다 만 형태로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고 너덜너덜한 누더기의 이미지로 알고 있을 수 있다. 만들어진 이미지. 착각.
시작이 착각이니 착각을 메우려는 것도 착각일 수밖에 없다. 겹겹이 착각으로 둘러싸여 내 본래의 모습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포기한다는 건 이미 있는 걸 되려 하는 헛된 수고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인가가 될 필요가 애초에 될 필요도 소용도 없다는 거다. 내가 이제껏 원했던, 되려 했던 모습이 본래의 내 모습임을 이미 알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떠오른다. 되려 했던 것이 아니라 돌아가려고 했다. 내 안의 나는 오래전부터 그렇게 말했지만 그렇게 듣지 않은 건 나다. 이것도 아니면 내 본래의 모습을 잊고 있었을 수도….
드러내려면 겹겹이 쌓여있는 착각을 치워버려야 한다. 동시에 더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걸 멈추어야 한다. 포기보다는 멈춘다는 말이 나에겐 더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그러면 맨 아래의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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