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구분하려 한다.
가장 먼저 날 막아선 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하고 싶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지? 단순히 하고 싶은 것은?'이라는 질문에 즉답이 나온다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난 머뭇거리다 결국 답을 생각해 내지도 답을 하지도 못한다.
‘해야 하는 것은?’이란 질문에는 즉답할 수 있다. 해야 하는 건 심지어 너무 많아 당황스럽다. 해야 하는 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그리고 다시 의문이 든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의 차이가 있긴 한 걸까?’ 이 질문에도 답을 할 수 없기에 난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을 구분하는 기준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요히 해야 하는 것의 기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내가 떠올리는 해야 한다는 것과 그 기준은? ‘그냥….’이라는 말이 입에서 맴돈다. ‘그냥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냥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지?’ 누가 시킨 것도, 당장 하지 않으면 위협을 느끼는 것도 아닌데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것들.
내가 나를 가만히 보면, 놀고먹는 걸 좋아한다. 근데 또 그게 싫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하기 싫다. 근데 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하고 싶다. 막상 뭔가를 할 때는 어렵고 힘들어 싫은데,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쓸모없는 내가 느껴진다. 쓸모없는 나는 어떤 경연대회에 참가자의 말처럼 마치 내가 ‘상한 우유’가 된 것 같다. 당장 갖다 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우유다.
‘해야 한다는 것들’이 내 안의 소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실 자발적이라는 말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인간은 타자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 않나. 나를 처음 세상에 나오게 한 나의 부모가 나에게 붙여준 이름으로 나를 불러주지 않는다면 나는 내 이름을 가지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해야 할 것들을 누군가가 말해주었다면 내 것인 양 받아들여 내 것이라 믿을 것이다. 오인과 착각. 라캉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상상계라 말했다. 말 그대로 상상, 오인의 세계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 원하는 것을 찾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아닐까’ 하는 또 하나의 의문이 든다. 어차피 순수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존재하지도 않는다면 그걸 찾겠다는 건 소용없는 일이다. 그저 내가 원한다고 생각하고, 해야 할 일이라고 떠올리는 것들은 오인이라는 걸 깨닫고 인정하는 것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끊임없이 헤매는 건 멈출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