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소리 따라갔다가 쌀 120인분 씻었다
수능이 끝났다.
머리나 좀 식히자 싶었다. 딱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행자 옷을 입고, 120인분 쌀을 씻고 있었다.
아, 이게 진정 네가 원하던 길이더냐.
나는 불심이 강한 집안에서 자랐다.
중간에 잠깐 성당도 다녔다. 엄마가 미사포 쓰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였다고 하셨는데, 마침 옆집 아줌마가 손을 내밀었고, 온 식구가 별 저항 없이 따라갔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 따라 교회도 나갔다. 드럼이랑 전자기타에 맞춰 부르는 찬송가는 꽤나 신났다. 솔직히, 살짝 종교를 바꿔볼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교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눈을 뒤집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는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로 아무리 꼬셔도 교회는 다시 가지 않았다. ㅋㅋㅋ
장래희망을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과학자요." "선생님이요." 아이들이 차례로 대답했다.
내 차례가 됐다.
"저는 스님이 되고 싶습니다."
반 전체가 깔깔깔 웃었다.
이게 왜 웃기지?
목사님, 신부님, 수녀님이 되고 싶다는 애들한테는 아무 말도 없으면서. 나는 속으로 그게 영 이상했다.
더 웃긴 건 그다음이었다. 담임이 엄마한테 따로 연락을 했다. 엄마는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고 박카스 한 상자에 돈봉투까지 챙겨서 학교에 갔다.
담임 왈: "어머니, 혹시 집에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어떻게 아이 장래희망이 스님입니까."
엄마가 나중에 말해줬다. 놀란 건 내가 스님이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런 걸로 사람을 불러놨다는 것이었다고. 바쁜 사람 시간 뺏어서, 뭐가 문제라고. 원래 성격이었으면 박카스 박스로 그 인간 면상을 갈겼겠지만, 막둥이 남은 학기를 위해 꾹 참고 돈봉투 놓고 왔다고 하셨다.
그 봉투의 효력은 딱 일주일이었다.
순천 근처엔 꽤 유명한 사찰들이 많다. 우리 집은 송광사, 화엄사를 자주 다녔는데, 그곳들은 승가대학이라 예불 전에 어린 스님들이 법고를 치셨다. 북으로 마음 심(心) 자를 그리며— 이 세상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뜻을 담아.
어릴 때부터 그 장면을 수없이 봤다.
그 북을 치는 스님들의 뒷모습에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있었다.
나도 언젠가 저 북을 꼭 한 번 쳐봐야겠다.
근데 저 북은 스님만 칠 수 있다잖아.
그래서였다. 어린 마음에, 그냥— 저 북 한 번 쳐보고 싶어서 스님이 되고 싶었다.
수능이 끝났다. 점수를 보니 갈 만한 4년제 대학이 없었다. 재수할 형편도 아니었고, 아무 데나 들어가자니 학비가 만만치 않았다. 그냥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겠다 싶었는데— 집에서 매일 빈둥거리는 게 가족들한테 미안했다.
그래서 무작정 2박 치 짐만 메고 향일암으로 갔다.
어릴 때부터 자주 가던 곳이었다. 바닷가 절벽에 숨어있는 그 암자는, 이상하게 가면 마음이 편해졌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 도착하면— 그냥 좀 살 것 같았다.
도착하자마자 바다를 한참 보다가, 배가 고파서 사무실에 들어가 여쭤봤다.
"점심 좀 먹을 수 있을까요?"
흔쾌히 공양간으로 데려가 주셨다. 산채비빔밥을 미어터지게 먹었다. 왜 절밥은 그렇게 맛있는지.
배가 부르자 뻔뻔해졌다.
"저 이틀만 여기 머물러도 될까요?"
살면서 그렇게 인상 험한 분은 처음 봤는데, 의외로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그날 밤, 나이 드신 노보살님들과 한방에 누웠는데— 방 밖으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살며시 방문을 열고 나갔다.
어둠 속 바다를 바라보는데, 저 멀리 수많은 오징어 배들이 떠 있었다. 밤하늘에 별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았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앉아 있었다.
인상 험한 스님이 다가오셨다. 그런데 인상과 달리 꽤 부드러운 분이셨다.
"꽁밥은 안 돼. 절에 있는 동안 일 좀 할래? 용돈도 줄게."
"네, 뭐 하면 되는데요?"
"기왓장 불사. 붓글씨로 가족 이름 써주는 거 팔아라."
호객행위였다. 근데 용돈을 준다는데 못 할 것도 없지.
바로 엄마한테 전화했다.
"엄마! 나 향일암인데, 알바 좀 하다 며칠 뒤에 갈게. 나 찾으면 종무소에 전화해."
그래. 나 이제 열아홉이야. 내가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나이라고.
과연 나는 기왓장을 팔긴 한 걸까? —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