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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비나 Oct 01. 2022

남들은 이해 못 할 나만의 여행 속도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일상 만들어 가기

아니 그걸 왜 거기까지 가서도 하고 있어? 한국에서도 다 할 수 있잖아.


스물두 살 제 손으로 번 돈, 백만 원을 들고 저는 인도로 떠났습니다. 배낭을 메고 두 달을 홀로 떠돌아다녔지요. 그게 제 첫 여행이었습니다. 두꺼운 인도 가이드북을 손에 쥐고 저는 거기에 적힌 곳을 다 돌아다니다시피 했습니다. 거쳐간 곳을 펜으로 지워가면서 말이죠. 남들 하는 것처럼 중간중간 다음(Daum) 카페에서 한국인 동행도 구했습니다. 두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이 있었지만 매일을 참 분주하게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제가 단 하루도 ‘관광객’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마치 며칠 뒤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처럼 말이지요. 가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지 않는 한, 유명하다는 관광지와 액티비티는 하나도 그냥 넘기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저는 짧으면 하루, 길어도 사나흘만에 도시를 옮겨가며 최대한 많은 곳을 보고자 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는 보통의 여행자들과 속도를 맞춰 걸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들 사이에서 점점 뒤처지기 시작한 건 서른이 가까워질 때였습니다. 떠나 있을 수 있는 절대적 시간이 길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직장 생활을 하며 기껏해야 며칠, 길어도 이주일밖에 휴가를 낼 수 없었을 때, 그때부터 제 여행의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으니깐요.






이제 제게 여행이란 새로운 곳에서 또 다른 일상을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어디로 떠나든 모든 것의 중심은 그 장소의 풍경이나 관광지가 아닙니다. 제 자신입니다. 그 어떠한 것도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도시에서 더 나은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시작한다고나 할까요. 새해가 다가오면 모두들 의욕에 넘쳐 신년 계획을 세우고 열심히 실천해나갑니다. 그게 ‘1월 효과’라면 저는 ‘여행지 효과’를 이용합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설레는 마음처럼 새로운 나라, 지역을 방문합니다. ‘이곳에선 내가 어떤 모습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과 함께 말입니다.



미지의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저는 한국에서는 귀찮아서 해볼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걸 ‘여행지 효과’에 힘입어 하나 둘 해치워 나갑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 정리 하기, 스트레칭 하기, 명상 하기 등 사소한 일상 습관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합니다. 꾸준히 글쓰기, 특정 분야 책 다독하기, 언어 공부하기, 스포츠 하나 배우기 같은 제 나름의 ‘대형 프로젝트’를 만들어보기도 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 투성이인 곳에서 적당히 제 일도 해 가면서 주변을 즐기는 쏠쏠한 긴장감이 꽤나 흥미진진합니다. 하지만 저도 사람인지라 이 ‘여행지 효과’도 얼마 가지 못합니다. 다시 게을러지려 하는 것이지요. 슬슬 귀찮음의 관성이 돌아올 때쯤 저는 다시 배낭을 쌉니다. 또 제 의욕에 불을 지를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도시를 옮겨갑니다.



사실 홀로 떠돌아다니다 보면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시간이 많습니다. 나를 알아가고 보살필 수 있는 최고의 기회지요. 저는 한국에 있을 때 보다 다른 나라에서 유독 더 제 몸과 기분을 챙깁니다. 여행 중 본격적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 숙소 주변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거나 헬스장에 갑니다. 기초 체력을 기르는 동시에 그곳의 운동 문화도 체험하는 효과적인 방법이지요. 어떤 기구가 인기가 있는지, 여자들은 어떤 운동을 많이 하는지, 무엇을 입고 운동을 하는지, 그 안에서 사람들끼리 어떻게 교류하는지 등을 한국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떨 땐 일일 이용권을 끊어 동네 헬스장이란 헬스장을 다 돌아다니는 나만의 투어를 만들곤 합니다. 우연히 들른 공원에서 줌바 댄스 무리에 합류하여 춤을 추기도 하고요.



어딜 가나 하나라도 더 구경하기 위해 끼니를 거르는 일은 없습니다. 저도 처음 도착한 곳에서 하루 이틀은 외식을 합니다. 식당이든 길거리든 가리지 않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어떤 걸 먹고사는지 훑어보는 것이지요. 그 이후에는 주로 동네 시장이나 마트에 가서 장을 봐서 정성 들여 요리를 합니다. 그곳 사람들이 먹는 현지 농산물을 제 손으로 직접 골라 매 끼니에 듬뿍 넣습니다. 식당에선 상상할 수 없는 양으로 말입니다. 정체모를 국적의 음식을 만드는 게 대부분이지만 저는 최대한 식당에서 먹었던 현지 요리를 따라 하려고 노력합니다. 영양을 챙기면서도 주민 흉내를 내보는 과정이랄까요.






특히 호스텔에서 일을 시작하고 난 뒤로는 여행하는 속도가 더 느려졌습니다. 최소한 한 달 이상을 한곳에서 머물기 때문에 저만의 일상을 유지해가기 쉽습니다. 저는 근무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책만 달랑 들고 길을 나섭니다. 동네 책방이나 카페를 찾아다니며 차 한잔 하는 게 제 하루의 낙입니다. 그렇게 거리를 쏘다니다 보면 어느새 제 머릿속에 저만의 동네 지도가 완성됩니다. 자연스레 자주 들르는 가게가 생기고, 주민들과도 한 두 마디 말을 트게 되면서 친해지지요. 헬스장도 아예 정기권을 끊어버립니다. 고정된 시간에 운동을 하러 가다 보니 그 시간대에 오는 회원들끼리 금세 얼굴을 익히고 같이 운동을 하기도 합니다.



제 여행 방식을 들은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한국에서도 할 수 있는 걸 왜 거기까지 가서 하고 있냐고요. 그 시간에 유명한 곳을 더 구경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저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한껏 꾸미고 다듬어진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보단, 일반 시민들이 실제로 자주 들르는 곳에 가는 게 더 좋습니다. 자본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 진짜 현지 문화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고나 할까요.  



관광은 아예 안 하냐고요? 그건 아닙니다. 보통 이주일에 한 번씩은 저도 다른 외국인들이 다 거쳐가는 곳을 따라갑니다.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이 투어를 갈 때 끼어 가는 것이지요. 그래도 예전처럼 저는 더 이상 맛집이나 랜드마크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인증샷에 목숨 걸지도 않고요. 그 순간 ‘내’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가 중요한 것이지 저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의 유명세를 따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명언이 여행에도 적용됩니다. 여행 자체가 사람을 바꾸는 건 아닙니다. 저도 처음에는 한국을 떠나기만 하면 또 다른 내가 돼서 돌아오는 줄 알았습니다. 첫 여정으로 인도를 선택한 것도 그 이유였지요. 인도 땅만 밟으면, 인도에서 시간만 보내면 갑자기 어느 날 깨달음을 얻어 ‘성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수많은 배낭여행을 거치고도 큰 변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관광 말곤 별다른 목적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요.



여러분의 여행 속도는 어떤가요? 어떤 게 적당한 속도라는 정답은 없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어딘가에서 돌아왔을 때, 그곳을 가기 전과 후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보세요. 저는 여러분도, 다녀오면 자신의 어딘가 한 구석쯤은 달라져 있는 여행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Photo by Annie Spratt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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