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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ctor flotte Apr 12. 2024

생각의 단위, 개념

뜬구름도 잡을 필요가 있으니까 잡는 것이다

생각에도 단위라는 것이 있다. 아무렇게나 막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자가 없으면 치수를 잴 수 없듯이, 벽돌이 없으면 담을 쌓을 수 없듯이 그런 단위가 있다. 철학자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말인데 우리는 그걸 개념이라고 부른다. 개념을 통해 생각하는 우리를 물론 사람들은 뜬구름잡는 얘기나 한다고 말하겠지만, 뜬구름도 잡을 필요가 있으니까 잡는 것이다.


개념을 가지고 얘기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장점이 있다. 우선 나는 개념을 알고 있어야 한다. 어떤 개념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데 인터넷에 흔히 돌아다니는 뜻들을 가지고 얘기하기에는 성이 차지 않기 때문에 원래 그 개념이 처음 등장한 맥락까지 찾아본다.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 전에 개념의 뜻을 찾아보며 우리 철학자들은 생각을 한다. 따라서 사실은 조용히 텍스트를 뒤지는 시간이 철학자에게는 소중하다. 보다 정제된 신중한 말을 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그리고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념을 가지고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을 가지고 말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건 나쁜 것도 아니고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렇게 개념을 이해하고 개념으로 말하거나 글을 쓴다는 것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생각을 배려한다는 뜻이 된다. 내가 마음대로 말을 만들어낸다거나 유행하는 말들을 마구잡이로 쓰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된다. 그리고 사실 그런 유행어들은 등장과 함께 곧 사라진다. 머리에 담아둘 가치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미 있는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이니 상대방이 배경지식이 있다면 정확히 이해할 것이고, 모른다면 찾아보면 된다. 그럼 그도 나처럼 생각하는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내가 그리고 상대방이 개념을 가지고 말을 하고 토론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불필요한 감정이 섞이지 않는다. 나는 상대방을 비난할 필요가 없다. 상대방이 사용하는 개념을 공격하면 되는 것이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나는 개념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인격을 건드릴 필요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정말 멍청한 짓인데, 대부분은 개념을 통해 생각하는 연습을 거치는 동안 그런 실수는 적어지기 마련이다.


개념이란 배워야 하기에 말하기 전에 생각을 하게 되고, 정확한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하기에 내 표현을 자꾸 정리하게 된다. 개념을 사용한 대화는 상대방을 위한 배려이다. 그리고 대화는 가끔 흥미진진한 토론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모두가 개념이라는 규칙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 토론은 재미있다. 토론과 인격모독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철학에는 최초의 그런 개념들이 존재한다. 더욱이 2천 년도 더 된 책이 있고 그 안에 적어도 앞으로 2천 년 동안 사용하게 될 소중한 개념들이 사전처럼 정리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제5권 델타권을 그래서 우리 철학자들은 소중하게 그리고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생각은 연습과 준비가 필요하고 가끔은 중요한 도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행어나 신조어도 아니고 전문용어나 시사상식도 아닌 더 소중한 생각의 단위가 있다. 시어만큼 아름답진 않지만 생각을 전진시키고 하루 종일 앉아서 한 문단이라는 작은 집을 지을 수 있는 블록이 있다. 사람들 앞에서 감정에 못 이겨 소리 지르고 욕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기나 하는 한심한 행태의 대부분은 서로가 개념들 사용하지 않는 데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개념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니 당장 눈앞에 있는 저 사람을 모독하고 욕하고 헐뜯는 일밖에 달리 남는 게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철학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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