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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ctor flotte Apr 26. 2024

철학이 허락하는 만큼

– 철학자의 오만에 대하여

‘나’는 얼마나 철학적이고 얼마나 비철학인가라는 질문은 철학을 처음 시작했던 시절 종종 ‘나’를 괴롭혔던 질문이었다. 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어떤 철학적인 기분 속에서는 나는 철학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밥을 먹거나 줄을 서거나 수업시간에 늦어 뛰어 가거나 멍청하게 TV를 보고 친구들끼리 잡담을 할 때는 비철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별게 다 문제가 되어 그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그러고는 나는 얼마나 철학적인 인간이고 얼마나 철학적인 인간이어야 하는가라는 꽤 다급했던 질문은 잊혀 갔다. 내가 본 책들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수업시간에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교수를 만나지 못한 것도 이유였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아직도 속 시원히 해결되지 않았는데 옛날처럼 괴롭지는 않다. 대충 넘겨버리는 나쁜 근성이 생겨 버린 것이다. 나이는 이렇게 먹는 것이 아니다.


예전의 그 질문을 다시 가져올 수는 없다. 분명 그 문제는 그렇게 묻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궁금해서 질문을 던질 때에도 우리는 신중해야 한다. 질문은 이미 답을 가리키고 있어 자칫 내가 아니라 잘못 던진 질문이 답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나는 그걸 모른 채 어리석게도 뭔가 답을 찾았다고 안심하기도 한다.


혹시 이런 게 아닐까? 내가 철학자로서 성실한 삶을 살거나 그렇지 않은 삶을 사는 문제가 아니라, 철학이 내 안에서 뛰어다니다가 또 어디론가 숨기도 하는 것이 아닐까. 철학이 마음대로 활동을 하다가 숨거나 거짓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런 가능성을 생각해 보는 것은 하루를 즐겁게 만드는 일이다. ‘즐거운 학문’


내 안에 철학이 있다거나 철학이 나를 움직인다는 말은 정말 이상하게 들린다.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학습이 되어 나 아니면 저것, 저 사람이라는 관계 이상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 이 세상이 나를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철학이 나를 움직인다는 말은 메스꺼운 음식처럼 삼키기 쉽지 않다.


그 사이 아주 나이를 허투루 먹지 않아 한 가지는 깨닫게 된 것 같은데, 그것은 사춘기 반항 같던 그 질문 속에는 편협한 생각이 한 개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저들 평범한 인간들보다 더 철학적인 사람이고 그래서 저들과 같이 일상적인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젖어 있던 것이다. 내가 괴로웠던 것은 더 철학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고귀한 정신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저들에 대한 무시가 다였다. 나는 저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쓸데없는 고집을 버릴 만큼 생각이 깊지 않았다.


어제 저녁에는 짜증이 나서 아내에게 함부로 말을 했다. 책을 읽고 있는데 퇴근 전부터 오늘 저녁에 무얼 먹을지 자꾸 물어보는 바람에 그랬다. 먹는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쏘아붙인 것이다.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먹고 웃고 떠들고 핸드폰이나 보는 이 일상이 다 하찮아 보였다. 그렇지 않은 나로서는 이 정도면 꽤 참아주는 것이라고 다독이면서 말이다.


복잡하거나 어려운 말이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철학적인 인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은 보다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사람이 잘 때에는 아이와 어른의 구분이 없다. 그렇게 둘 다 위아래가 안 어울리는 이상한 옷을 입고 순진무구하게 자는 아내와 아이를 보면 알게 된다. 이 천사 같은 사람들은 철학을 모르기에 나보다 수준 낮은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지 않는 그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철학이 허락하는 만큼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나 역시 철학이 허락하는 만큼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철학이 나에게 무얼 얼만큼 허락한지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비교할 생각을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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