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octor flotte Jun 14. 2024

세상을 보고 있지만 내가 없는 상태

- 인간과 기억력

1층 할머니가 없어졌다. 언제나 반듯한 가운데 가르마에 은비녀를 꽂고 계셨다. 왜 우리 나이가 많은 할머니들은 다들 그렇게 체구가 작은지 멀리서 보든 가까이에서 보든 다른 세상에 사는 소인 같았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들은 다들 착하다. 먹을 것이 생기면 할머니는 문 앞 관리 아저씨한테도 나누어 주셨다. 아저씨는 괜찮다며 큰 목소리로 껄껄 웃으면서 받아 간다. 이런 모습이 아마 2달 전까지였던 것 같다. 1달 전쯤부터 뭔가 이상했다.


그 할머니는 보통 반듯한 가르마를 타고 아파트 바로 앞 인도에 나와 딱 노인들을 위해 누가 갖다 논 허름한 의자에 앉아 계셨다. 그럼 두부장수, 메밀 장수, 양말 장수 아저씨들이랑 사는 얘기를 주고 받으며 하루를 보내신다. 그런데 한 달 전쯤인가, 할머니가 그 짧은 거리를 가다 말고 길 중간에 서서 갑자기 모든 걸 잊어버린 사람처럼 멍하게 서 있는 것이었다. 기억이 멈춰 걸음이 멈춘 것이다. 누구나 그 얼굴과 눈을 보면 안다. ‘할머니가 갑자기 기억을 잃었구나’


할머니는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그냥 작은 나무처럼 서 계셨다. 당황한 건 나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우선은 할머니한테 위험한 일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고, 바로 근처에 관리 아저씨도, 요즘 얘기를 많이 나눈 두부장수 아저씨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며칠 후였다.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이상해서 나가보니 그 할머니가 우리집 초인종을 누른 것이다. 그리고 며칠 전 그 표정의 얼굴로 약간 혼란스러운 듯 말을 꺼냈다. ‘우리집이...’ 할머니가 기억을 잃고 본인 집까지도 못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1층 나는 같은 동 7층이다. 슬리퍼를 신고 할머니를 모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을 눌렀는데 할머니는 집이 20층이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아파트는 15층이 다고 할머니는 집이 1층이라고 내가 말했다. 할머니는 다시 자기 집이 20층이라고 말했지만, 자기도 자기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아무말 없이 나를 따라 왔다. 1층에 내려 바로 앞에 있는 잘 아는 관리 아저씨한테 얘기했다. 대신 댁으로 모셔달라고 얘기하려는데, 관리 아저씨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아, 이 할머니 정말 미치겠네. 도대체 왜 자꾸 이러세요!’ 요즘 들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아무튼 엘리베이터를 탔다. ‘기억, 기억력... 사람이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 이 생각을 하며 올라왔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가 없어졌다. 집은 있는데 할머니가 없다. 대머리에 마찬가지로 체구가 작은 땅딸보 아저씨가 목장갑을 끼고 할머니 짐을 꺼내고 있었다. 그 아저씨는 할머니 아들 같았다. 할머니는 작은 장독으로 된장이나 고추장을 많이 담갔나보다. 아들이 분리수거장에서 장독들을 망치로 깨서 버리고 있다. 관리 아저씨한테 물어보니, 아들분이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낸 것 같다는 것이다. ‘요양원’, 한국에서 부모님을 요양원에 보냈다는 것은 다 아는 그런 의미이다. 아마도 할머니는 병동같은 건물에서 은비녀를 꽂고 20층에 있는 집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계실 것이다.


우리 인간이 그리고 삶이라는 것이 기억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만큼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생각하고 있다. 사실 기억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내 것이긴 하지만 한 번도 보거나 만난 적이 없는 실은 나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내 뇌가 하는 것이다. 내 뇌가 기억을 안 하거나 못하면 나는 길을 걷다가 서 있어야 하고 나무가 되어야 하고 20층에 있는 우리 집에 가려는데 사람들이 못 가게 하는 이상한 일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다가 모든 기억과 함께 내가 나로부터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세상을 보고 있지만 내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전 13화 그냥 동물이 죽는 게 싫어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