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TMI입니다

나의 사유에세이 2

by 영자의 전성시대

어릴 때, 우리 엄마는 음식 솜씨가 좋아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자주 밥을 먹었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을 이모, 삼촌으로 부르며 매우 가까이 지냈다. 옛말처럼 ‘그 집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집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나의 성적을 비롯해 소소한 일들까지 공유되었다. 초등 고학년 때쯤, 엄마에게 제발 좀 내 이야기는 하지 말아 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했지만 지금까지도 내 이야기는 공유되고 있다.


아이를 낳고 답답함에 밖으로 유모차를 끌고 나가면 주위 사람들이 아기를 보느라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낯가림이 있는 나지만 우리 아기를 좋아해 주고 예뻐해 주니 기분이 좋았다. 그분들과 육아에 대해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육아 도움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시간이 거듭될수록 타인과의 대화에 조금씩 덜 어려워졌고, 특히 아기 엄마들과 만날 때에는 오래된 친구처럼 내 이야기를 공유했다.



몇 년 전부터, TMI(too much information)라는 신종의미의 단어가 생겼다. TMI는 너무 많은 정보를 공유하는 것을 말하지만 그런 행위를 하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예전의 우리 엄마 시대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즉, 타인이 궁금해하지 않는 것까지 이야기하는 사람을 일컫는데, 더 나아가 오버하는 행동을 하거나 개인이 만든 선을 넘을 경우, TMI라고 쉽게 표현한다. 이 말인즉슨 내가 알고 싶지 않은 건 말하지 말아 달라는 의미가 포함된다. 피곤한 인생에 더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말뿐 아니라 감정의 TMI도 배제할 수 없다. 서로의 간극을 필요한 만큼만, 합의한 만큼만 지켜주는 것, 이 시대에 이 약속 즉 각자의 ‘선’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 시대는 더 변해간다. 이제는 오다가다 만난 사람에게 말을 건다거나 하는 행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더구나 이웃끼리 집을 오픈해서 서로 음식을 나누고 삶을 나눈다는 건 극히 드문 일이 되었다. 나 또한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 각자의 선을 지키며 살려고 노력한다. 세대가 다른 우리 아이들은 그 선이 나와는 좀 다르다. 이 아이들 세대는 ‘절대로 해야 하는 것’보다는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 참 많다. ‘절대로 지켜야 하는 것’을 하고 살아온 나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을 안 하고 살아온 우리 아이들과는 그 선이 다르다. 그래서 가끔씩 우리의 선은 혼란스럽다.



얼마 전부터 강아지를 기르며 애견의 세상으로 들어선 우리 가족은 늘 새로운 경험을 한다. 매일 산책시켜야 하고 강아지의 표현 들을 배우며 키우고 있다. 그렇다 보니 나는 예전처럼 길 가다가 산책시키는 다른 개를 만나면 개에게 말을 시키기도 하고 견주와 눈빛 교환도 하고 궁금한 것들을 묻기도 한다. 우리 강아지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하다 가끔은 마음이 통해 전화번호를 교환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 순간, 우리 아이들은 매우 어색해하며 “엄마는 진짜 TMI이야!”라고 쓴소리를 한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는 나, ‘Too much information’은 되고 싶지 않다. 마치 TMI는 신종 병균처럼 피해야 하는 인간상 같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 정보의 홍수 속에 더이상 듣고 싶지 않은 정보를 흘리는 사람, 피로사회에서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 만나면 불쾌해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나는 더 이상의 관심을 끄고 황급히 자리를 뜬다. 도대체 어느 지점이 TMI인건지 알 수가 없다.


아침마다 동료가 우리 아파트 앞으로 카풀을 하러 온다. 거의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아침마다 곤혹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가 그 동료에게 말을 건다는 거다. 내가 지하에 있는 차를 가져올라치면 그 선생님에게 다가와 차 가지러 갔으니 다리운동이나 하고 있으라고 한다는 거다. 동료가 나를 기다리는 잠깐에 계단을 오르내린다거나 무릎을 들고 내리는 운동을 하며 종종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걸 지켜보셨던 아저씨가 친절하게 기억해서 이야기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곤혹은 그분의 과한 친절함이다. 모른 척해주면 훨씬 편할 텐데. 그분의 TMI에 나도, 그 동료도 불편하다.


몇 번의 같은 일을 반복하다가 문득, 내가 지금 하는 말과 행동이 진짜 TMI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물었어야 할 질문을 이제야 했다. “이게 왜 TMI야?”라고. 그리고 아침마다 경비 아저씨의 과한 배려가 진심 TMI인지에 대해 숙고해 본다. 그 아저씨와 내가 살아온 시대와 지금의 2022년의 패러다임은 분명 바뀌었지만 나도 그분도 지금 살고 있고, 살아가고 있다. 경비 아저씨 세대는 모르는 사람까지도 몇 번 보면 배려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친절’이라고 배웠을 것이다. 나는 지나다가 인사나 가벼운 정보 정도는 나누어도 실례가 아닌 것으로 배웠다. 지금 세대는 그것을 ‘선을 넘는 행위’로 분류한다. 선을 넘지 않는 것이 ‘나이스’한 사람 되는 것이고 선을 넘으면 ‘무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의 혼란은 시작된다. 옛날 사람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내가 ‘나이스’한 사람은 되고 싶다. 선을 지정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그 선을 넘는 ‘옛날 사람’으로 불리기 싫다. 나 스스로 옛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설파하면서 정작 선을 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다. 나는 TMI를 하면서 그 아저씨의 TMI는 싫고 불편하다. 나의 TMI를 지적하는 딸들에게 반기를 들며 이건 TMI가 아니라고 설득하는 나를 어쩌면 좋으랴!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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