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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라던 고무나무에 잎사귀가 났다

by 영자의 전성시대

나에게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그건 어떤 식물이든 내게 오면 다 죽어버리는 기가 막힌 능력이다. 선인장은 물을 많이 먹어 뿌리가 썩어 죽고, 다육이는 말라죽는다. 커다란 나무도 키워봤지만 물을 줘도 죽고 물을 안 줘도 죽더라. 가족들은 내가 식물을 키우는 건 잔인한 일이라며 극구 사 오거나 키우는 것을 말린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봄이 되고, 갖가지 꽃들이 만발하면 동의는 흔들리고 어느새 내 손에는 식물과 잘 키워보리라는 다짐을 들고 집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해서 산 것 중에 고무나무가 있다. 벌써 우리 집에서 산지 7년이 되었다. 원래 사 왔던 고무나무는 죽고 가지치기해서 심은 가지 두 개만 남아 작은 화분에 심겨있다.


이번 겨울을 나며 잎사귀는 바래졌고 두어 장밖에 안 되는 잎사귀는 내 얼굴만 하게 커져서 보기에 아주 괴이한 형상을 띠었다. 이쁘지는 않고 자리만 차지하는 고무나무에 정이 떨어졌고 그냥 뽑아 화단에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잎사귀를 잡고 뿌리를 뽑을 생각에 힘을 주는데 두 개중 하나 잎사귀가 너무 커서 뿌리까지 흔들렸으나 끝내 잎만 뜯어졌다.


일단 잎만 뜯은 후 다음 기회에 뽑아야겠다고 그대로 두었고 옆의 식물들에게 물을 주며 고무나무줄기만 남은 화분에도 물줄기가 흘러가게 두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두어 달이 지나 베란다에 물을 주러 가니 죽은 줄 알았던 고무나무에서 싹이 나와 비죽이 연둣빛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머나 너 죽은 거 아니었어?" 나도 모르게 이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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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아이는 대답이 없었고 나는 연달아 "와 넌 아무도 모르게 싹 틔우고 있었구나, 이런 기특할 수가!" 물을 잠그고 가만가만히 고무나무를 바라보았다. 이리 질긴 생명이 여기 있었네. 모진 외면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성장하고 있는 이 나무는 나보다 더 대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죽으라고 뿌리도 흔들어 놓았는데 그 고통을 견디는 시간을 보내고 자그마한 싹까지 틔우다니, 준비되지 않은 감동과 자연에 대한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죽이려 했음에 미안했고, 외면한 존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아니, 작은 '나'가 감히 생명의 존엄 앞에 함부로 했다가 정신 번쩍 나게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정성스레 물을 주고 난 뒤, 이 아이와 약속했다. 앞으로 너를 소홀히 대하지 않겠다고, 예쁘고 고운 눈으로 바라보겠다고, 네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돕겠다고 말이다.


죽을 것 같은 날에도 싹은 나고, 죽고 싶은 순간에도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죽으라던 고무나무에게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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