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
조금 더러운 이야기
요새 들어 부쩍 뷔페에 갈 일이 여러 번 생겼다. 뷔페에 가면 아까운 ‘소식좌’ 스타일이라 잘 가지 않는데 두어 번의 결혼식과 작은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올라오셨다고 대접한다고 해서 가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기름진 음식을 먹게 되고 저주받은 장은 여지없이 탈이 났다. 한 번 탈이 나면 음식을 가려 먹어도 3~4일은 고생해야 한다. 화장실이 가까이 있으면 아무 일도 아니지만 화장실이 없는 경우는 죽음이다.
나의 사랑하는 ‘장’으로 말하자면 할 말이 너무나 많다. 한 번은 터키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날이었는데 터키 음식이 나에게 맞지 않아 거의 굶다시피 했고 뭐라도 먹을라치면 화장실행이었다. 아침 식사도 거르고 버스에 올라탔는데 속이 부글부글해서 마음이 안절부절이었다. 역시나, 국경을 넘어 어느 고속도로 위에서 나는 차를 세우고야 말았다. 내 안색을 본 가이드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바로 세웠고 나는 가이드라인 뒤로 뛰었다. 그 차에 타고 있던 많은 이들이 눈에 밟혔지만 창피하지 않았다. 일말의 이성도 나에겐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차로 돌아왔을 때 민망하게도 차에 있던 분들이 박수로 나를 환영해 주었다.
또 기억에 남는 건 필리핀 레가스피로 봉사활동을 갔을 때이다. 이곳으로 대략 10여 년을 비전트립으로 봉사활동을 갔는데 가기 전, 나의 제일 기도 제목은 ‘장’이었다. 그곳은 워낙 열악해서 바다 위에 막집을 지어 사는 곳이라 화장실이 딱히 없다. 우리가 일하는 곳은 화장실이 있으나 화장실을 들어가면 오히려 구토 증상까지 더해지는 곳이라 죽기 일보 직전까지 참아야 했다.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면 화장실은 거의 없었기에 장이 한번 뒤틀리면 나는 식은땀에 등이 젖고 불안한 마음으로 더 힘들었다. 그중 가장 고생했던 것은 장이 좋지 않은 기미가 보이자 지사제를 먹었는데 그게 너무 효과가 좋아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변비로 결국 병원에 가서 해결해야만 했더랬다.
이런 장을 갖고 태어난 나는 내 몸에 맞춘 생활을 하느라 늘 소식을 하는 편인데 뷔페의 기름진 음식으로 탈이 났고, 다음 날이 지인의 결혼식이 있어 다녀와야 했다. 결혼식장에서 가볍게 먹었음에도 가족들과 집으로 오는 길에 장이 슬슬 뒤틀리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배를 꼭 잡고 대략 30분 정도를 가면 집이니 참아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나의 장은 인내심이 없었다. 곧바로 신호가 왔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거친 소리로 아무 데나 내려 달라고 요청했다. 차만 다니는 길이라 주위에 상가가 보이지 않아 난감한 상황이었다. 앞쪽에 천주교 성당이 보였지만 불이 다 꺼져있어 그냥 지나치려 하는데 남편님이 성당에 화장실이 있을 거라며 차를 세워주었다.
문이 닫혀 있을까 봐 조마조마하며 갔는데 한쪽의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행여 누구라도 만나면 사정 설명을 하려고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아 문으로 들어갔다. 반갑게도 바로 문 옆이 화장실이었고 나는 헐레벌떡 들어가 볼일을 보았다. 그리고 나오는데 마음에 여유가 흘러넘치고 미소도 지어졌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그렇지. 종교계가 이렇게 사소하지만 화장실을 개방함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편의를 봐주는 게 작은 사랑의 실천이지.’ 누구라도 마주치면 인사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차로 돌아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는 이제부터 성당을 좋아하기로 했어. 훌륭하게도 화장실을 개방해 놓았더라고. 말로만 사랑의 실천을 하는 게 아니라 이런 게 진짜 사랑의 실천 아니겠어?”라고 하니 다들 어이없어 웃었다. 하지만 내 말은 진심이었다. 요즘 코로나로 대다수의 건물이 문을 꼭 닫아놓는다. 우리 교회도 문을 닫아 성도인 나도 평일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개방해 놓으면 더러워지는 것은 기본이고, 다수의 사람이 들어와 위험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기에 화장실 개방은 골치 아픈 일일 것이다. 그런 일을 감안하고 라도 이렇게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것이 종교계가 보여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아까 화장실 들어갈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나올 때는 별의별 생각을 한다. 이래서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라고 하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