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환하게 웃으면

by 영자의 전성시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신 이상재 선생님이 계신데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젊은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력 있는 분이셨다. 이분은 유머러스한 분으로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으로 승화하며 죽음의 공포를 이기는 힘을 가르치신 분이다. 임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놈의 새끼들, 나 뒤졌나 보러 왔지? 아직 안 죽었다. 이놈들아."라고 말해 그곳에 있던 사람들을 웃음 짓게 만들었다.


<어쩌다 어른>과 <책 읽어 드립니다>에서 패널로 나온 심리학자 김경일 교수의 <적정한 삶>에서는 이 일화와 더불어 웃음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 있는 에필로그에 웃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옳은 일, 가치 있는 일을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원대한 가치나 흔들리지 않는 신념도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세계를 놀라게 할 만한 대단한 결과물도 결국은 무수한 일상들이 쌓아 올린 결과다. 심리학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어떤 일을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은 신념과 가치지만, 하루하루를 계속 이어가게 만드는 힘은 웃음에서 나온다고.'


예전에 재미있게 시청했던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나온다. 지진이 발생한 후나 전염병이 창궐한 뒤, 지뢰밭 사이를 걸어야 하는 매우 심각한 상황 속에서 의사인 여자는 군인인 남자에게 웃겨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남자는 어이없는 농담을 던지고 둘은 "피식'웃음으로 심각한 상황의 문제들을 해결할 잠시나마의 쉼과 힘을 얻는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정확한 나의 신념이 확고하지 않으면 흔들리고 그 흔들림에 괴로워짐을 경험했다. 그래서 나의 가치관을 확립하려 애쓰고 그 가치관을 바탕으로 나만의 신념을 견고히 하는 과정 중에 있다. 그리고 그 신념이 나의 생각과 삶을 지탱해 줄 것이라 믿었다. 책을 읽고 공부하고 고민하고 사색하며 사뭇 심각해져 갔고 개그 프로그램 같은 억지웃음을 유발하는 건 가치가 없다 생각해 보지 않았다.


어린 날에는 시험이 끝난 날이면 종종 만화책을 잔뜩 빌려 밤새 낄낄거리며 읽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면 시험스트레스가 거의 날아간 듯 느껴졌다. 심지어 중학교 2학년 때는 수업 중에 친구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게 웃겨서 웃다가 주의를 받았다. 그런데도 웃음이 멈춰지지 않아 계속 웃었고 화가 나신 선생님은 우리를 복도로 쫓아내셨다. (내 인생에서 쫓겨난 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만큼 충격적인 일이다.) 중요한 건, 여기서도 웃음이 멈추질 않아 결국 복도에서 종 칠 때까지 손도 들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에 그리 웃겼는지 모르겠지만 그때 그 시절이 무척이나 그립다.


다시 생각해 보련다. 내 가치와 신념으로 꼿꼿이 서 있는 법을 배웠다면, 이제는 웃음으로 고개 돌리는 법을 배워야겠다. 마치 선풍기가 회전하며 주위를 시원하게 하듯이 내 웃음의 고갯짓으로 주위를 환기시키며 긴장을 풀어 주며 따사로운 공기를 주입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 보련다.


혼자가 익숙한 사회, 희망보다는 절망의 이야기가 더 공감 가는 사회, 이해와 포용보다는 칼날 같은 비판이 우선인 우리네 사회에서 나 한 사람의 웃음이, 너의 환한 미소가 하루를 이어나가게 만드는 힘이 된다면 당연히 노력해야지. 나로 인해 우리 학교 학생 한 명이, 더 나아가 한 반이, 한 학년이 하루를 살아갈 힘이 된다면야 침을 질질 흘릴 만큼 웃으며 정신 나간 선생님이어도 좋으니 그리 하겠다.


우리 집에도 끊임없이 시도 때도 없이 농담과 썰렁한 이야기를 수십 년째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가끔은 짜증을 유발하는 부작용이 있지만 이 사람의 노력으로 지금 우리 가정의 따사로움이 유지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웃자. 누군가의 환한 웃음으로 누군가가 또 하루를 살아갈 테니 따사롭게 웃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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