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을 다시 공부하며

리비도와 타나토스, 꿈의 해석을 중심으로

by 법과사회



1. 새롭게 알게 된 점

가. 리비도(libido)와 타나토스(Thanatos)에 대하여

1) Freud는 삶의 특정 사건을 해석하여, 이에 대응하는 방식 그리고 그 전반의 정신 과정을 이해하는 근본 원리로서, 리비도(libido)와 타나토스(Thanatos)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내가 이해하기로, 리비도는 생을 유지하고 무언가를 창조하는 심리적 에너지다. 반면 타나토스는 무언가를 파괴하고 공격하여 죽음을 선사하는 심리적 힘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왜 인간의 마음엔 창조와 파괴, 생성과 소멸, 질서와 혼돈, 안정과 불안, 생과 죽음에 대한 힘이 공존하는 것일까? 아니 동시에 존재해야만 하는 걸까?

2) Freud는 그의 저서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If we may assume as an experience admitting of no exception that everything living dies from causes within itself, and returns to the inorganic, we can only say ‘The goal of all life is death’, and, casting back, ‘The inanimate was there before the animate(Freud, 1922, p47).’”

3) 즉,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그 생명체 내부의 이유로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우리가 생명 현상이라 말하는 모든 삶의 사건들이, 사실은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단면일 뿐이라고 프로이트는 설명하는 것이다. Freud는 인간의 생존 본능과 행동이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수한 현상’이라 말한다.

4) 리비도와 타나토스의 개념은 Freud 이전, 철학사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인간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성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최대한 죽음에 저항하여 자신이 도달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끊임없이 이를 위해 노력하려 한다. 어떻게든 유한한 삶에서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만약 삶의 무한함이 보장되어 있다면 우린 무언가를 얻고 이루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그걸 알기에 우리는 무언가에 도전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 투쟁만이 각자에게 수없이 많은 삶의 쓸모를 만들어준다. 이런 관점에서 타나토스란 리비도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전제일 수 있다. 생이 죽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사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 법칙에 종속되는 것 같다.

5) 물리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한다. 그들은 절대 불변의 법칙으로 열역학 제2 법칙을 제시한다. 흔히 엔트로피 법칙이라 하는데, 두산백과에 실린 정의는 다음과 같다. “고립계에서 총 엔트로피(무질서도)의 변화는 항상 증가하거나 일정하며 ‘절대로’ 감소하지 않는다. 에너지 전달에는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과정은 가역과정이 아니다.” 간단히 말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절대로 스스로 정리되거나 질서 있는 상태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 현상이란 무질서도를 낮추는 고도의 작업이다. 반드시 에너지가 필요하며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식으로, 적절한 양이 투입되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인체가 아무리 노력하여 엔트로피를 낮추는 방향으로 작동해도, 언젠가는 이 작업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된다. 세포 분열 과정 중에 암세포가 생겨나기도 하고, 분열에 실패하는 세포도 생겨난다. 우리는 이를 노화라 부르고, 그 과정의 끝에는, 죽음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물리학적으로 생명 현상이란 우주에서 매우 드문, 기적에 가까운 현상이다. 사실 우주의 대부분은 죽어있다. 그 절대적인 질서를 거슬러 살아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기적이다. 하지만 이 기적은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 언젠가 잊힌게 마련이다.

6) 거기에 우리가 매 현실 사건의 이해하고 대응하는 방식도 리비도와 타나토스로 설명할 수 있다. 내면의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서 폭식과 폭음을 했다고 가정하자. 하지만 그 이후 우리는 숙취와 거북함으로 한동안 괴롭다. 따라서 자신에게 다짐한다.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리비도에 따라 새로운 질서가 세워진다. 하지만 그 질서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면 그는 삶의 활력을 잃게 된다. 그러면 다시 타나토스가 작용해 그 고루하고 빛을 잃게 하는 질서를 무너트린다. 리비도와 타나토스는 이 과정을 반복하여, 현실의 삶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삶은 언제나 리비도와 타나토스를 지나는 그 어딘가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7) 죽음은 생을 보호한다. 낡은 자아가 부서지고 파괴되어야 더 새롭고 건강한 자아가 생겨난다. 푸르던 잎이 떨어져 부식되어야 그곳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동한다. 야만적이고 구시대적인 관습이 그 생을 다해 사라져야 더욱 공정하고 안정된 규칙이 생겨난다. 타인과 불필요하고 비정상적인 패턴의 관계밖에 맺지 못하던 사람은, 그걸 버려야 비로소 더 건강하고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생긴다. Freud가 인간의 심리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했던 이 두 개념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 세계의 현상과 사건을 이해하는 보편적 실체이다.


나. 원초아(Id)와 자아(Ego)에 대하여

1) 현재 지도하고 있는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Freud가 제시하는 성격 구조(원초아, 자아, 초자아)에 대한 내용을, 토론 자료로 나누어 읽었던 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어떻게 해야 이들 관계를 잘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Freud가 1923년에 발표한 『The Ego and the Id』에서 아주 적절한 비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2) “The functional importance of the ego is manifested in the fact that normally control over the approaches to motility devolves upon it. Thus in its relation to the id it is like a man on horseback, who has to hold in check the superior strength of the horse; with this difference, that the rider tries to do so with his own strength while the ego uses borrowed forces. The analogy may be carried a little further. Often a rider, if he is not to be parted from his horse, is obliged to guide it where it wants to go; so in the same way the ego is in the habit of transforming the id's will into action as if it were its own(Freud, 1923, p25).”

3) 이해한 대로 해석해보자면, 원초아와 자아는 말과 기수의 관계와 같다. 기수는 어떻게 해서든 그 강대한 힘을 가진 말로부터 떨어지지 않기 위해 말을 꽉 붙잡아야 하는데, 말과 기수의 관계와 실제 원초아와 자아의 관계에서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기수는 자신의 힘으로 말에게 매달려 있지만 자아는 그 힘조차 원초아로부터 빌려 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결국 기수는 말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말을 모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는 때로 기수가 말의 욕망을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4) Freud가 원초아와 자아의 관계를 소개한 이 비유로부터, 나는 자아가 참으로 고달픈 역할을 떠안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그 어떤 심리적 에너지도 생산하지 못해 원초아에 기대 살아야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 원초아의 그것을 철저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자칫 잘못하면 낙마할까봐 말의 기분을 살펴야 하면서도, 이를 달래서 원하는 목적지로 향하게 해야 하는 고달픈 존재가 바로 자아가 아닌가. 게다가 그에겐 매사 다른 사람의 음성으로 잔소리를 퍼부어 대는 초자아(Superego)에게도 귀 기울이어야 한다. 또 삶의 여정이란 이런 심리 내적인 과정만 잘 다룬다고 헤쳐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현실이 한 인간에게 요구하는 실제 사회적 압력은 못지 않게 강대하다. 자아는 여러 현실적 스트레스와 압박에도 적절히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이 총제적인 과정에서 자기 삶의 이유를 찾아나서야 한다. 문득 학부에서 현대심리치료를 강의하시던 교수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암흑 속에서 낭떠러지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면서 즉, 정서적인 고통을 경험할까봐 두려워하면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과 유사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어둠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늘 두렵고 늘 불확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의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는 비유를 한번 마음속 깊이 새겨보시기를 바랍니다.”

5) 그래도 어쩌겠는가. 사람 구실 하며 살려면 자아의 힘을 길러야 한다. 원초아의 즉각적인 만족 추구 요구를 감언이설로 달래어 지연시킬 만큼, 자아는 충분히 단호한 태도로 설득력을 갖추어야 하며, 차후에 충분한 보상을 해줄 만큼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 안 그러면 원초아는 제멋대로 굴어 그 강대한 힘으로 자아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게 뻔하다. 원초아와 잘 지내는 건 자아가 해야 할 일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인간은 부조리한 현실을 살아간다. 자아는 이 현실을 직면하여 삶이 우리에게 바라는 그 요구도 충족해야 한다. 이는 가끔 이해할 수 없는 형태로 나타나 우리 두 어깨를 짓누르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비유에 이를 덧붙이자면, 그 둘은 때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을 건너야 하고, 때론 초원을 가로지르기도 하며, 때론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숨기도 하고, 때론 남들이 다 잘 때 밤새 목적지에 가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아는 그 누구보다 강해져야 하며 스스로를 보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그 누구보다 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어쨌든 말에게 얹혀가는 신세이기에, 올바른 삶의 기준을 세워 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자기 자신과 잘 지내는 인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2. 공부한 것 내 삶에 적용해보기

가. 대상관계 심리학

1) 대학원에 진학하기 전, 학부 교수님을 찾아뵙고 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교수님 저는 이제야 진짜 어른이 되는 방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이전에는 그저 피터 팬처럼 살아왔거든요.”

2) Winnicott의 이론에 따르면, 나는 아마도 거짓 자기만을 발달시켜왔을 가능성이 높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난 항상 부모를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려 노력했던 것 같다. 너무 버겁고 힘들었지만, 그것만이 부모에게 짐이 되지 않는 또는 버림받지 않는 길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난 이를 지난 연인과의 관계에서 깨달았다. 이별의 순간이 마치 어머니에게 버림받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지는 때와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람들과 불안정 애착을 맺어 홀로 있는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도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또한 타인에 대한 이상화 또는 평가절하를 반복하고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인격장애라 불릴 정도는 아니지만, 이는 타인과 건강한 관계를 맺는 데 충분히 방해될 정도였다.

3)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단 내게 이런 심리적 문제가 있음을 인정했다. 그리고 정신분석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내 무의식을 의식화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엄청나게 고통스러워 도망치고 싶었지만 더는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지금까지 거의 10년 넘게 걸린 것 같다. 그 결과 이제는 어린 시절 심리적 상처에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또 내게 스스로 좋은 부모가 되어주기로 했다. 그토록 미워하며 사랑했던 부모와 서로의 마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간 타인과의 관계에서 획득했던 정체성의 본질을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최종적으로 정의하는 존재가 나란 사실을 스스로에게 강조하고 있다. 더하여 그동안 외면했던 욕망을 바라보고 수용하고 달래주었으며, 남들과 적절한 관계를 맺기 위해 사회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는 그간 미성숙한 채로 두었던 내 자아를 돌보고, 자꾸 연습하여 자아가 합리적으로 삶을 이끄는 힘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또한 여러 가지 옳고 그름 또는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을 재정립함으로써, 조금 더 이런 일이 수월해졌다. ‘자아’가 성격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만큼, 이를 어떻게 키우고 훈련해야 하는지 배우는 것, 그것을 내 정신건강 관리의 핵심으로 두고 있다.

4) 추가로 요즘은 인간관계에 대하여 좀 더 공부하고 있다. 독서 모임을 만들어 적절한 관계에 대하여 서로 토론하고 그 어려움에 대하여 나누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갖고 있다. 항상 느끼지만 다른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는 언제나 내게 치유적 효과를 준다. 그들에게 나를 비추어 내 무의식적 욕망을 발견 또는 재확인하거나, 효율적으로 욕망을 다루거나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역시 인간은 다른 인간과 함께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나. 꿈의 해석

1) 반복되어 나타나는 꿈이나, 잊을 수 없이 강렬한 꿈을, 평소에 분석하여 무의식의 목소리로 여겨 이를 의식으로 수용하는 편이다. 보통 내 꿈의 해석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과 현재 광운대에 재직하는 김서영 교수의 『내 무의식의 방』을 참고로 하여 하고 있다.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가장 최근에 꾼 내 꿈을 나름대로 분석해보려 한다.

2) 단순화된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난 반드시 가야 하는 목적지가 있다. 그런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군중을 따라 어떤 버스를 탄다. 하지만 버스 기사는 내게 자꾸만 알지 못하는 언어로 내리라 말한다. 난 모른 체 하지만 너무나 명확히 내게 하는 말이기에 할 수 없이 버스에서 내린다. 그는 따라 내려 날 위로해준다. 내가 내린 목적지는 사람이 많은 번화가다. 그곳은 장대에 걸린 광대들이 화려한 차림으로 사람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곳이다. 난 그들을 잠시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이윽고 내 갈 길을 걷는다. 그런데 갑자기 평지였던 길이 낭떠러지 절벽으로 변한다. 난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왼쪽을 바라보니 가면을 쓴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이 있다.

3) 꿈의 해석을 최대한 간략하게 해보려 한다. 난 장기적으로 임상 또는 상담과 관련된 최상위 자격증을 모두 취득할 계획이다. 이는 ‘가야 하는 목적지’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렵고 고달픈지,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현실적으로 알 수 없다. 군중심리에 따라 많은 사람이 행동하는 것처럼 해보지만, 그렇게 해서는 원하는 목표에 다다를 수 없다. 따라서 내면의 인도자(이는 분석심리학적 개념 중 자기에 가까움)는 내게 올바른 길을 일러준다. 그 길은 겉으로 보기에 고난의 길이다. 가면(마찬가지로 분석심리학적 개념 중 페르소나를 상징)을 쓴 사람들 즉, 집단규범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걷는 이 길이 관심의 대상도 아니다. 이런 삶의 방식에 관심도 두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가야 한다. 왜냐하면 상담 센터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뒤, 약 1년간 이 길을 걸을 것인지에 대하여 충분히 고민해왔기 때문이다. 이미 마음의 정리가 끝나, 평생 이 길을 걷기로 했기에 꿈에서도 그 마음이 흔들리진 않았다. 다만 앞으로 닥칠 그 막연함에 대한 불안감이 ‘절벽에 홀로 매달려 있는 상태’로 표현된 것 같다. 그런데 긍정적인 신호가 있다. 꿈에서 홀로 절벽에 남겨졌을 때, ‘나는 그러니 천천히 신중히, 충분히 기다리고, 충분히 힘을 키워, 매사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 살아가자고 생각’ 했었다. 여태 대부분의 삶을 도전적이고 즉흥적으로 사는 편이었는데, 이제부터는 계획적이고 규칙적이며 안정적이고 질서정연한 삶의 방식도 내게 필요하다는 무의식의 신호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방망이를 깎아 이쑤시개로 만들 만큼 신중하지는 않지만, 돌다리를 두드릴 만큼은 신중한 자세로, 삶의 여러 사건에 임하려 노력하고 있다. 막상 해보니 그 일정한 루틴과 드릴 속에서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고 있다. 항상 나를 인도해주는 마음속 존재에게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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