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방식으로 폭풍을 대비하다
진단을 받고 한 달 동안 남편은 가족 외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를 꺼렸다. 이유를 묻자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병원을 수소문하며 동네방네 알렸던 나와는 달리, 모든 과정을 내가 주도해서였는지 남편은 나에게도 말을 아껴 달라고 부탁했다. 답답한 날들이 이어졌다.
당장 음식부터 가려 먹고 조심해야 할 남편은, 본가와 친정에조차 알리지 않은 상태로 일상을 그대로 이어갔다. 그러다 보니 제사를 비롯해 각종 가족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해야 했고, 피해야 할 음식 앞에서도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놀이 삼아 쑥을 캐러 오신 형님네와 어울리다 보니 아주버님이 내미는 컵라면도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쉼 없는 일상이 아슬아슬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남편은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훌라와 당구를 치고 오곤 했다. 결국 나의 간절한 설득 끝에 어머님을 제외한 양가 형제들에게 병을 알리기로 했다. 내 암 소식에 이어 남편의 암 소식까지 전해지자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어떤 섣부른 위로조차 건네지 못하는 무거운 분위기가 전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 역시 이 모든 상황이 그저 나쁜 꿈이길 바랐지만, 현실은 현실이니 하루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살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 와중에 웃지 못할 씁쓸한 사실 하나. 이 절박한 순간에도 ‘피 한 방울’의 무게는 여전했다는 것이다. 시댁과 달리 친정에서는, 아직 온전치 못한 환자인 내가 또 다른 환자를 보살펴야 하는 상황에 대한 걱정이 훨씬 앞섰다. 나 역시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마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남편이 병원을 오가며 수술 전 검사를 받는 와중에, 나의 추적 검사일도 돌아왔다. 종일 병원에 머물며 채혈부터 CT, 뼈 스캔까지 여러 검사를 받아야 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남편이 나를 대하는 태도였다. 예전의 그는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운전기사처럼 자기 역할에만 충실했었다. 그런데 자기가 진단 받고 나서는 한결 세심하고 다정하게 나를 챙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은 역시 입장이 바뀌어 봐야 제대로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프고 나서야 내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려주는 남편이 내심 고맙고 뭉클하면서도, 막상 그의 진짜 몸 상태를 마주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내 마음은 다시 무거워졌다.
아니나 다를까, 8년 동안 건강검진을 외면해 온 남편의 성적표에는 여기저기 빨간 경고등이 켜져 있었다. 수술 적합도를 확인하기 위한 검사 결과, 고지혈증과 더불어 관상동맥이 좁아진 곳이 두 군데나 발견되었고, 폐에는 결절도 보였다. 또한 대장에 있는 선종도 암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고지혈증은 당장 약 처방을 받았고, 나머지는 타 과와의 협진을 통해 수술 가능 여부부터 확인해야 하는 산 넘어 산의 상황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수술’이라는 것도 아무나, 원한다고 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수술받을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적 같고 감사한 일인지도 새삼 깨달았다.
남편은 의사와의 긴 상담 끝에 로봇수술을 받기로 했다. 로봇수술은 흉터를 작게 남기고, 정확하며, 통증이 덜해 회복이 빠르다고 들었지만, 덜컥 결정하기엔 여러 가지로 고민되는 지점이 많았다. 망설이던 중 코디네이터에게 다시 묻자 이런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콩 하나를 손으로 집는 것과 젓가락으로 집는 차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 비유에 갑자기 모든 것이 확 와닿았다. 힘보다는 정교함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술이라는 것, 그리고 그 ‘조금의 정확함’이 수술 이후 남편의 삶의 질을 크게 좌우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비용 차이가 제법 컸지만, 다행히 보험으로 상당 부분 커버가 가능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집으로 다시 내려온 남편은 틈만 나면 당구를 치러 다녔다. 젊은 시절 형편이 어려워 당구를 배우지 못했다던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당구에 푹 빠져 지냈다. 생일 선물로 개인 큐대까지 받은 후 당구장을 들락거리며 한창 실력이 늘어가던 중이었는데, 하필 이 시점에 암 진단을 받게 된 것이 본인 스스로도 무척 아쉽고 억울하다고 했다. 등산을 위해 시작한 고등학교 동기 모임이 어느새 당구 모임으로 바뀌었고, 남편은 틈틈이 따로 연습까지 한 결과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모임 내 ‘2인자’ 자리까지 꿰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남편은 마치 푹 빠져 사랑을 나누던 연인과 갑자기 생이별하게 될 위험에 놓인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수술을 코앞에 두고도 당구장으로 출근 도장을 찍는 그 뒷모습을 보며 처음엔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오죽하면 저기에라도 매달릴까’ 싶어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오기도 했다.
우리는 남편의 수술을 앞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폭풍 전야의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억울함을 달래듯 한풀이하며 당구를 치러 다닐 동안, 나는 한 달 가까이 비우게 될 집의 공백을 준비했다. 미뤄둔 염색을 하고 치과 정기 검진을 다녀왔으며, 베란다의 식물들이 말라 죽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다. 또한 혼자 지낼 아들이 밥을 굶지 않도록 밑반찬을 만들고, 간편하게 데워 먹을 수 있는 반조리 식품을 주문해 냉장고를 채우는 등 집안 안팎을 단속하는 데 주력했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달력에 굵게 동그라미 쳐 둔 ‘그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