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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짚모자 아저씨의 상상력

사람의 품격

by 나땅콩




1



붕~날아서 뚝~떨어졌다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는 건너, 시간이 투망처럼 펼쳐지는 곳에 착지했다

가랑잎에 미끄러졌고 마침, 도랑을 뛰어넘으려는

중이었다 장딴지의 근육 어딘가에서 '드드득' 타개 지는 재봉선의 소음이 들리는 듯했다

한참을 지나고서야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았다 무르팍이 바닥에 닿아서 흘렸던 피가 껌딱지처럼 붙어있었다


다리의 개수가 모자라는 해물탕 속의 꽃게처럼 기울어져 걸으려니 기우뚱한 통증이 내디뎌졌다

불과 얼마 전에는 멀쩡했었는데 감당할 수 없는 이상반응이었다 뻐근하고 아렸다 힘을 주는데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까마득히 파고드는

불안감의 거품에 휩싸여 한껏 움츠러드는데 들려왔다


그만하길 다행이다!


아니, 이게 다행...?






2



나는 산을 내려와 한의원으로 갔다 이대로 주저주저하다가는 더 한 고통을 감당해야 할 것 같아서 문 닫는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렀다


"당분간은 움직이면 안 돼요"


그러려니 짐작을 하면서 왔으나 다시 그 말을 듣게 되니 새삼스러웠다

언젠가는 이 말을 하고 싶다는 망설임이 호기를 가다듬는 중이었다


움직일 거면 여길 왜 오나요?

움직여야만 하니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니까 오는 건데요..


공연한 사람에게 풀이하는 나, 밑바닥으로부터

후끈 달아서 고속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성냄이라 지웠다


그러는데 또 다른 이가 생각났다

생나무 가지를 꺾어 지팡이로 쥐어 주는 밀짚모자 아저씨였다


"다리가 부러지거나 그나마도 못 걸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라도 걸을 수는 있잖아"


불행의 모서리를 깎아주려는 의도란 건 알지만 서두르지 않고 평소와 같이 정해진 등산로를 걸었더라면 아무 일 없이 무사했을 것을 거란 후회가 밀려드는 순간이라서 그런지 그의 말들은 튕겨져 날아갔다

이 황당하고 느닷없는 사고의 현장, 굴곡 없는 평상심의 겸허는 내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나친 긍정의 습관이거나 밑도 끝도 없는 낙관이 비뚤어진 편견이 고개를 들었다

사실 그대로를 파악해야 하고 불행에 대한 사후대책이 필요할 뿐인데 모호한 감성으로 에두르려 한다는 반사적인 거부감이었다


이튿날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 매끈하게 생긴 목발을 내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제 훨씬 괜찮을 거야!


나는 어색한 뻐쩡다리를 서툰 목발에 의지하며 버텼다 당연한 것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서 아우성을 쳤다 시위를 벌이는 하루를 살아내고 나니 이대로 헉헉대다가는 주저앉다 못해 누워버릴 지경이었다


일상의 '사이즈'와 속도의 영점을 손보기로 했다 달팽이로 변모해 점액을 흘리며 지나온 느린 경로를 칭찬하기로 다짐했다

다음을 위한 첫걸음을 더욱 심각한 장애를 당했을 경우, 그 가능성의 참혹함으로 대체했다


사나흘쯤 지났으려나? 붓기도 조금 가라앉고 발을 디딜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도 덜해졌다

일상으로 가기 위해 버텨야 하는 날들이 머잖아 정리될 거라는 기대가 생기자 그제야 멈추었던 주변이 돌아봐졌다 당분간은 미뤄야 할 것의 우선순위가 눈에 들어왔고 감당의 순서들이 매겨졌다


그동안에 당연한 것들이 주단처럼 펼쳐져있었음도 감지하지 못했음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연은 나를 호위무사처럼 인도했고 왕관을 쓴 군주인 나는 큰 병에 걸리지도 병원신세를 진 적도 없어서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이 그 숱한 고마움의 것들을 하찮게 여겼다

내게, 당연은 굳건한 필연이었다






3



열흘쯤이 지났다,

평소보다 자주 눈에 띄는 멧비둘기처럼 웅얼웅얼 기웃대는 새, 딱딱한 나무를 쪼아대는 딱따구리로 드러나고 참새처럼 등뒤에서 쫑알대다 안부를 묻고 포르릉 날아가는 밀짚모자 아저씨,

힘든 일에 구원타자처럼 홀연히 나타나 안타를 쳐주던 그에게 목발을 돌려주는 한낮, 맛있는 점심 식사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어떠한 만남도 거부하지 않는 그가 싱글벙글 앞장을 섰다


공교롭게도 맛집들은 만원이어서 세 번째 식당에

도착해서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배가 고파진 내가 툴툴거리는 그때, 그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여기가 문을 닫았더라면

우리는 더더욱 배가 고파져야 했을 거야

다행히 우리를 맞이해 주는 식당을 찾았어,

설령 문이 열려 있다 해도, 주인이 이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면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없었겠지....


나는 답답해지는 마음에 툭하니 식탁 위에 사선으로 긋는 말들을 던졌다


그럴리는 없어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요!


창밖에 벚꽃과 갓 피어나는 철쭉과 여기저기 놓인 화분들의 풍경이 흠칫, 안을 들여다보는 고요한 찰나가 지나고 있었다


나는 다리를 다친 이후, 내가 느낀 당연한 것들에 대한 송구함과 불편함을 덧붙여서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내가 주도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 당연하지 않은 노력들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다

나는 애썼다, 내가 처한 상황을 바꾸려 했다, 성실함으로 풍토를 기름지게 하고 환경을 개선했으며 만족을 위해 인내하고 자제했다


그러나 목표를 향한 나의 부단한 집중과 올곧은 지속에 대하여 대가로 받아도 되는 것들에 대하여

세상은 당연하지도 공평하지도 않았다 늘 부족했고 나의 목표에 못 미치거나 빗나갔다

나의 과정들은 내가 직접 행동으로 일구어낸 당연함이었는데 무시되기 일쑤였다

나의 당연함과 세상의 당연함은 늘 마찰을 빚었고 다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정받고 싶었고 존중되길 바랐다

이와 같은 나의 주장이 관철되어야 옳다는 심정좋은 말만 하는 밀짚모자 아저씨에게 전달하려 나는 한참 동안 열띤 말들을 토했다


그래, 그렇지, 네가 하려는 건 맞지, 너는 그것을 가질 수 있고 당당하게 내 거라고 주장할만하지, 그건 아주 당연한 거야 하지만....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외투의 안쪽을 뒤척이며 무언가를 꺼내려는 듯 움직였다 손안에 깨지기 쉬운 유리잔이나

작은 새의 알을 감싸고 있는 마술사의 손 같아 보였다 애매모호한 잠깐이 지나고 나면

쫑긋한 귀를 가진 토끼나 앵무새가 소매 끝에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잠시 후, 홀쭉한 긴 목의 유리병이거나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물놀이 기구와 같은 자그마한 물건이 그의 손 안에서 나왔다

그는 순풍을 향해하는 돛단배처럼 허공의 파도를 넘어가는 시늉을 하며 웃으며 말했다


부력의 힘으로 떠 있는 것을 부표라 부르지,

하지만 부표는 바닷물이 없으면 쓸모가 없기도

부력은 부표의 힘이지만 바닷물과 어울릴 때 발휘되는 힘이기도 한 거야!


생각에 아주 자그마한 부분을 다르게 써보는 거야,

바다에게 부표가 말하듯이 네가 있어서 고맙다고.. 모두가 함께 있어서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작은 생각,

...... 아주 조금을 변화시키는 거지...


밀짚모자 아저씨의 그다음 말들이, 잠을 깨우는 새들의 지저귐이거나 한밤중,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울어대는 수리부엉이의 목소리처럼 아득하게 멀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때마침 기다리던 음식이 나오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마친 그가 기쁜 노래를 흥얼거리는 사람처럼 맛있게 식사를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의 겨드랑이에 돋아있는 새의 깃털이나

등허리의 어딘가에 고스란히 접혀있는 날개가 떠올랐다

그가 머무르는 둥지와 그가 날아다니는 경로에

무수히 점 찍혀있을 그의 "작은 생각"들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졌다


그것은 아마도 "가치"라고 호명되어야 할 어떤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잊었던 안주머니 어딘가에 낡은 소지품과 같은 그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양심, 정의, 미덕, 염치, 헌신, 공존..... 문득 부끄러웠고 창피해졌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람으로서 품위를 지키기 위한 조금의 생각은 무엇인가?


그 한 뼘 영지가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닌가?


그가 나의 아픔의 과정을 아는 것과 세상의 다른 이면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어떤 숙성의 끝자락이 가져오는 성숙함이라는 것도 느껴졌다


기다리자!

이쯤에서 나도 그처럼..


우선, 내 앞에 당도하는 오늘을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먹기로 했다 고마운 마음으로 소화하기로 정했다

항아리 속에서 익어가는 발효의 과정처럼 생이 주는 통찰의 선물이 착실히 익어가기를 그와 같은 마음으로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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