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는 개다
집 마당에 사니까 요즘 표현으로 '마당개'
도로 옆 철망공장에도 가고 앞산 사과 과수원 백구들과도 안면을 트고 산다
가슴이는 '믹스견'이다
이 단어를 어느 젊음이 말하는 적에
나는 길쭉하고도 노란 봉지에 들어있는 인스턴트커피를 떠올렸다
음, 너는 커피인 개로구나!
뜨거운 물과 한 방향으로 섞여 매혹하는
이 한 모금을 나는 가끔 "똥가슴"내지는"개가슴"이라 호명한다
자기 이름 앞에 비하의 접두사가 붙어있음을
개는 모를 터이지만 먼 데서 부리나케 달려오는 모습을 볼라치면
인간 언어의 알맹이를 아는 눈치, 역시 개는 귀가 좋다
나에 이런 말본새는 자식이 생긴 후에 비롯되었다
조막만 한 새끼들을 나는 이런 식으로 불렀다
한동안 재미가 쏠쏠했는데 이제는 못 부른다 풍선처럼 커져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이 "세 살 버릇"은 멀쩡히 부활했는데
가슴이를 만족시킬 때에 증폭되고 과감해져서 도드라진다
주인으로서의 과시가 깔려있는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은행나무 아래 아무도 모르게 파놓은 은신처와 비닐하우스 뒤쪽에서 개는 득달같이 반응해 온다
물론, 불러도 아예 반응이 깜깜할 때도 있다
대개는 멀리 출타 중,
하기야 나도 어디 간다고 보고하고 가지 않으니
불러도 오지 않는다고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빈번해진다 싶어 질 때에
손안에 든 간식거리를 내려놓으며
나는 특단의 대책을 세운다
일부러 족발을 시켜 먹거나 외식을 한 후에를 뼈다귀를 왕창 챙겨 오거나
낱개로 포장된 커다란 과자봉지를 사는 것이다
예전에는 "옛다 생일이다"그러면서 한 번에 다 내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도 어느새 영악해졌다
약을 살살 올리면서 조금씩 생색을 내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바로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문틈 사이로 한 개씩만 입에 물려주는 것이다
나에 이런 의도된 행동에 콧구녕이 비상한 가슴이는
현관문 앞에 대기모드로 태세전환을 한다
내가 신발을 신기도 전에 문을 타격하며 격렬한 반응을 보내오며 충견으로 변신한다
낚시꾼의 손맛이 이러한고?
내가 일부러 문을 조금만 열고 줄둥말둥 애태울 때
문 안에 여자가 "몹쓸 짓"하지 말라고 타박을 하며 연타를 날린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허락도 구하지 않고 소중한 재미의 원료들을 일거에 모조리 줘버리기도 한다
나는 '가혹행위'이라는 독한 잣대의 적용이 가능한지를 가늠하다가 생각이 복잡해져서
하던 짓을 멈추기도 한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나의 이런 행동은 개간식으로 즐기는 줄다리기 놀이,
안과 밖을 사는 포유류 끼리의 식생활연대라 할만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가슴이 입장에서는 매우 부당한 '패악'이며 밉상의 '장난질'이라는 비난할 수도 있겠다
사실, 가슴이는 갓 태어난 적에 어미가 발치로 밀어낸 찌실배기 강아지였다
젖을 물려도 이내 밀려나는 위기의 어린 개를
우유로 키웠다
하지만 이 어리바리한 생명은 제법 자라난 이후에도
먹이를 선뜻 차지하지 못하고 늘 덩치 큰 형제들에게 밀려났다
성견 이후에도 먹이 앞에서 온전치 않아 보였다 군침을 흘리면서도 빙빙 돌거나 눈치를
살피며 딴전을 부렸다
나는 일부러 피해 주면서 멀치감치 떨어져 있거나 창틀 안쪽에서 지켜보았는데
언젠가는 왠지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찔끔 눈물이 났다
가끔 나는 가슴이가 좋아할 것들을 챙기며
그 흔한데도 불구하고 잡히지 않는 '사랑'이란 것에 대하여 생각한다
사랑이란 '좋은 것을 주고받는 일' 속에 용해되어 양방향으로 흘러드는 것,
그것은 받는 이보다 주는 사람에게 농밀하며 시소의 한쪽처럼 먼저 나누려는 마음 쪽으로 기울만하다
가슴이랑 산지도 어언 십여 년을 훌쩍 지났다
예전에는 장마대비 도랑을 칠 때도 곧잘 따라다녔다
낯선 사람이 방문을 하면 귀가 따갑게 짖기도 잘했었다
요즘에는 '컹'하고 한번 짖으면 그만이다
누가와도 신경 쓰지 않고 누워 지내는 시간이 많아 보인다
지난 무더위에는 눈자위도 흐리멍덩하니 불쌍해 보여서
가슴아! 가슴아! 하고 안쓰러이 불러보았는데 꼬리 끝만 보일 둥 말 둥 흔들었다
가슴이는 평화주의자
농촌의 발발이들은 대개 닭 잡는 선수들인데 가슴이는 멀찌감치 피해 다닌다
뿐만 아니라 길고양이들과도 엄포만 놓을 뿐 싸우지 않는다
나는 전번에 우연히 꼬리 짧은 노란 고양이와의 대결에서 가슴이가 줄행랑을 치는 현장을 목격하였다
겁 많은 것도 똑같은 우리는 한통속이다 싶어서
못 본 체해주었다
도시로 배달 가서 가끔 본다
탁자 위에 걸터앉아 있는 얌전하고 고상한 개
귀티 나고 어여쁜 개
몸을 말리거나 단장을 하고 있는 전혀 다른 층위의 개다
나는 반려견의 미용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의 출입문을 유심히 관찰했다
견주는 젊은 여자분들이 많았고 개와 사람이 친화력이 좋아서인지 닮아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꿈꾸듯 포근히 안겨 한 몸인 그네들의 모습을 감상하다가
나는 문득 다음번에 개로 태어나기를 염원했으나
가슴이 생각이 나서 급히 물렀다
가슴이는 처마 밑이 집이다
차고 한편에 집을 마련해 주었지만 부엌창문 아래,
빨래 건조대 곁을 떠나지 않는다
나는 이래저래 설득을 해봤는데 도무지 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가슴이는 구체적으로 전하는 나의 '개말'을 모르는 것 같았다
비가 와서 깔아준 헌 옷가지가 젖어도 떠나지 않고 고집을 부리길래 결국 개가 원하는 자리로 개집을 옮겼다
가슴이의 집은 기와지붕이며 현관은 아치로 이루어져 있다
고무대야 재질로 제작된 건데 시골 철물점 점포 밖에 허다하게 진열된 그것이다
작년 겨울에는 보온덮개를 덮어서 방한을 해주었는데 눈 내리고 바람 부는 날에는 바라보기가 짠했다
이참에 우리도 남들처럼 개를 방 안에서 키우면 어떨지를 고민한다
털북숭이를 들일수 없다는 원칙을 깰 수 없어 반발이 드셀 것이다
깨끗이 씻겨서 거실에서 같이 살면 춥지는 않으련만 난관이 예상된다
가슴이의 눈빛은 가슴가슴하다
좀 전에 수년간 내가 써온 베개를 안고 나를 쳐다보았을 때에도 그랬다
나는 가끔 가슴이가 나에 마지막 개가 될지를 자문해보기도 하고
또 한 번의 가슴이가 나와 동행하기를 소원하기도 하는데
이런 비밀을 품고 바라보는 가슴이는 나를 더욱 애틋하게 한다
모쪼록 산골짜기에 함께 사는 우리가
추운 겨울 이 골짜기의 야생동물처럼 험한 꼴 당하지 않고 그럭저럭 늙어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