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와 나 사이에 흐르는 강물
또 다른 길을 찾아서
1, 제 야
제야의 종소리를 기다리는 저녁에 만두를 빚었다
끝을 모아 붙이는 배부른 만두의 곁에 나룻배 모양을 만들어 내려놓는다
새카만 밤 새카만 머리카락의 유년이 창 너머에 와 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만두를 빚는 굵어진 나의 손가락을 보며 묻는다
아직도 거기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둔다
설설 끓는 찜통에서 만두를 꺼낸다
뜨거운 증기 속에 밝아오는 형체들은 모서리가 닳아있다
더러는 원형과 사뭇 달라지거나 접시에 담기기 전에 이미 구멍이 났다
나는 나의 만두를 입속으로 집어넣으며 내게 말한다
어차피 잘라먹을 바에는 만두의 겉과 속을 따로 끓여 퍼먹는 것이 나을 거라고..
그러면 이 말도 안 되는 저녁이 주는 의미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머니는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독였다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도 아물게 하는 능력이었다
안에서 터뜨려야 하는 것이 있다고 그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 밤에 숙명의 다른 이름을 손가락으로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입천장을 델 듯이 호통을 치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가 만두를 빚었는지 감시를 했는지 브라운관에 빠져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능력은 언제나 비범했고 칼날을 품고 있었다
만들어라.. 한눈팔지 말고.. 어서어서.. 눈썹이 새하얗게 변하기 전에..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소리를 불러냈다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줄어드는 주술이었다
어디선가 한밤중을 배회하며 찹쌀떡이며 메밀묵을 사라는 낮은 목소리가 노랫소리로 들렸다
바람이 쉬는 구멍에서 추위가 생쥐처럼 드나들고
밤하늘에 별들이 글썽이며 물들었다
밤이 깊어가면서 나는 만두소를 조금씩 더 채우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게 섞여야 했다
꾹꾹 눌러서 조용히 퍼 날랐다 이 밤은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차라리 가득 채워 버리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힐긋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졸고 있었다 아니다 그 딴것은 더 이상 상관없었을 것이다
포기였다 내 주변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빗금 속으로 들어앉는 거였다
중심을 움켜쥐고 하늘에서 가만히 내리는 것들이
닿지 못하도록 견뎌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미 만개할 줄 아는 밤은 웅덩이에 고이는 어둠이었다
멈칫거리다가 홀로 사라지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나갈 수 있게 틈을 벌려놓으라고 꼭꼭 야물게 닫으라고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앞장을 섰다
만두가 쪄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벽 너머, 누군가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계곡물을 건너려고 다급한 몸짓으로 펄쩍펄쩍 뛰어올랐으나 세찬 물이 귀로 자꾸 흘러들어 왔다
잠을 깨면 소스라치는 물속이었고 모자란 호흡을 위해 떠오르다 보면 어떤 힘이 머리를 눌러 댔다
어느 순간에 납덩이보다 무거운 추가 내 배속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종이 울리면 새해가 오려나
사슴이 끄는 산타의 뜨거운 호흡이 얼어붙은 괘도를 밟고 어제가 떠난 곳에
악을 물리치려는 서른세 번의 너른 소리가 울려 퍼지면 다른 새벽이 올 것인가
창문 들판에 성애꽃이 하얗게 피어올랐다
내 안에 담긴 만두가 채반 가득 쌓여가고
부른 배를 움켜쥐고 맥없이 돌아 누웠다
이내 내 몸에 뜨거운 수증기가 가득 차오르자 분노가 내게 말했다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은 차이가 없어
모두가 남이자 나인택이지 남들의 손으로 가득 채워놓고서 나를 잃을까 봐 벌벌 떨며 살아
고결함이나 더러움도 다르지 않지 냄새나기는 마찬가지야 애쓰고 있는 거지
애당초 소중한 것을 얻거나 잃었다고 아우성인 너의 표정도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지금 네가 간절히 원하는 걸 알아 바뀐 적이 없었거든
누군가 딱 한 사람만이라도 나를 쓰러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지지해 주길 원해
행여 끝나지 않는 시간을 있다거나 또는 일순간에 사라진다고 나를 속일지라도...
2. 수 생 식 물
스킨답서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식물이 있어
꽃을 보려고 키우는 게 아니야
날아가는 새가 분변을 지려놓고 간 것 같은 빛깔의 잎과 줄기가 뻗어나가려는 것을 보려는 거지
말이 좀 심했나 꽃이 들으면 속상하겠네
스킨답서스 아우렐리우스의 한 줄기가 유리잔에 채워 넣은 시간을 본 적이 있어
그 속에 하얗게 수염처럼 돋은 표정이 더랬지
그런 걸 복제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나는 그 후로 안스리움으로 그 뿌리가 옮겨가는 모습을 보았지 그리고 그다음에는 뿔이 돋아나는 짐승으로 옮겨갔지 사람들은 별일 아니라고 외면했지 하지만 나는 이동이라 하고 명명하고 싶었어 하지만 어색해질까 봐 참았지
그렇게 클 수 있는 게 양파의 본색이라 하더군 왜 있잖아 껍질을 벗기다 보면 무참하게 비어지는
동심원들
밑동을 잃어버린 무와 고구마 또한 유리그릇에서 복제를 해 여럿을 두루 거쳐서 이동해 온 거지 물론
그 과정은 투명해 흉내 낸 것이 아니야 아주 자발적인 움직임인 거야
아마 보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
그건 너무 자연스럽기 때문이지
그건 언제나 온전한 집중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아
정해진 순서는 잘 없어 아래든 위든 하얗게 내리고 푸르게 돋아서 굽이굽이를 넘어가는 거지
스킨답서스 아우렐리우스
나는 나의 손과 다리를 잘라서 여기저기서 복제하는 상상을 한다
투명한 유리병으로 옮겨간 일부들이 기지개를 켜듯 돋아나는 모습을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거야
혹시
끔찍하다고 생각하니 너는, 지금?
음, 그럴 수도 있겠네
두물머리로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지렁이처럼 순진하게 기어가는 물길을 보았어
물론 창밖이야
억새가 자욱하고 개구리 밥이 잔뜩 허니 들어찬 생각 속으로 들어가서 마구 헤집어 본다
작은 벌레와 거무튀튀한 뻘흙이 만져져
작은 조개나 징거미를 잡을 수도 있겠네
어쩜 나는
빨대 같은 걸 꼽고 사는 거지
물속에다가 말이야
따오기보다 길쭉한 주둥이를 박고 있으면
모세혈관 보다 치밀한 모터가 쉼 없이 돌아가는 거야
내뱉고 들이쉬는 숨쉬기처럼
물이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이동을 해
물의 깊은 바닥에서 산정 높은 바위틈까지
모두를 연결시키는 거지
스킨답서스 아우렐니우스
너는 조장을 아니..
내 얘기가 여전히 끔찍하니 너는?
나는 허풍쟁이가 아니야 그저 가끔은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생각을 해 기분이 좋아지는 상상이야
어쩌면 말이야 나는 그냥 통로일지도 몰라
지하수를 길어 올리는 오래 전의 펌프 같기도 해
마중물을 넣고 콸콸 길어 올리는 샘물처럼
능숙하지 못한 헤엄을 치면서 조금씩 앞으로 이동해 가는 거야
기운을 내라! 파이팅! 크게 소리를 치면서
때로는 기도를 타 넘는 물 때문에 컥컥 대면서 눈알이 빨개지기도 하는 거지
고즈넉한 물병에 우아하게 앉아있는 스킨답서스 아우렐리우스처럼 말이야
3, 도하, 그리고 물결에 비치는 달빛
내가 사라지기를 바랐던 날이 많았네요
당신과 나 사이에 나부끼는 휘장들을 걷어내며 거기에 적어놓은 편지글 같은 것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답니다
미움이 제일 먼저였고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모자람과 애석함과 미안함 그리고 고마움과 귀여움과 사랑스러움까지
모두가 네모를 꼬리처럼 달아 흔들리더군요
기어이 나는 잡초를 뽑듯 귀퉁이를 뭉뚝하게 우그러뜨리고 날카로움이 제거된 평화로운 공간에 당신을 모시기로 했답니다
그랬더니 당신의 홀씨들이 환영처럼 사라졌어요 그리고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안으로 들어와 아프게 박히더군요
나는 이내 바늘을 움켜쥐고 박힌 것을 뽑기로 합니다 고독의 뾰족하고 여린 살을 찔러 도려내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발굽에 징을 박 듯이 떼어낼 수 없이 한 몸으로 해 놨더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아파지고 피는 철철 나오고.. 나는 난감함 속에서 도리어 가만히 침묵의 손을 잡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네요
죽을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냥 그렇게..
거기서 보았어요 당산나무 금줄 걸린 네모들,
연달아 줄에 입을 대고 태어나는 모습을 보았지요
내가 나라고 당연시하는 치명적인 독은 누군가가 남긴 잔상이지만 그림자처럼 자취 없이 사라져요
무한반복의 심증만 남아서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들려오는 풍경소리지요
고작 남은 것은 부스러기, 숱한 도굴꾼의 지문으로 더럽혀진 무덤의 것들이라서 이렇다 할 만한 증거가 되지 못하는 거예요
물론, 분명한 기억은 알고 있어요
애정의 비가 촉이 틔우듯 새끼를 길러 가족을 이룰 수 있었던 나는 따뜻하게 내리는 고마운 물을 이런저런 그릇에 옮겨 놓고 생계를 이어왔던 거겠죠
하지만 물은 무서워요 두려움이지요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리고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아요
사람의 손길로 전수받은 것은 흔하디 흔한 공기 같은 것이어서 더욱이 잘 쓸려나가지요
요즘에도 비가 와요 내리는 비에게는 망각으로 이끄는 거대한 힘이 들었어요 처음을 바꾸거나 중간중간을 덮어서 잃어버리게 하는 거지요 아마도 몸이라는 도장으로 찍는 낙인과 같아요
하지만 잘못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손가락질을 하며 편을 나누자고 그러려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지요
엄밀하게 말하면 당한 일인 거잖아요 당하는 수준끼리 서로의 탓을 하기에는 우린 너무 가여워서 부서질 것만 같네요 그냥 이렇게 생각하기로 해요 이어달리기하는 사람들이 바통을 주고받는 것처럼 규칙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누구나 줄을 서는 질서가 잡히곤 하는 거잖아요
하지만 이건 꼭 말하고 싶어요 나를 밟고 지나는 사람들의 발은 애초부터 바닥이 없어요
어쩌면 발자국을 찍을 의도를 아예 갖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종적을 들키지 않고 늘어나는 고무줄처럼 도자기 하나도 채우지 못하는 이생의 부피가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제 가슴에서 바람이 나오는 줄 모르고 그렇게 비를 기다리다가 끝이 나는 거겠지요
나는 그렇게 당신을 버리기 위해서 애쓰다가 내가 먼저 사라지는 딜레마의 함정에 빠져 눈이 멀어요 소리마저도 내 귀를 먹어치웠지요
건널 수 없는 저 강물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요?
문득문득 생각이 나긴 해요
가장 아래쪽에 들었다는 어떤 장치 같은 것을 찾아내는 거예요
이를테면 지금껏 나는 나로 살았으니 당분간은 온통 당신으로 채워 살아보겠다고 도전해보는 겁니다
당신이란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흔적 없이 타버리면은 당신은 사라질까요
아니면 내가 사라지는 걸까요
하지만 그러진 말기로 해요
우린 서로 손을 잡거나 등을 밀어주는 사이예요 익숙하지요 한쪽으로 섞이는 건 불공평하다고 규칙위반이라며 투덜댈 거예요 그리고 그건 너무 위험하기도 하잖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아무 일도 못하면서 여전히 꿈을 꿔요 안전하고 무사한 나를 붙들어 놓고 싶은 거지요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런 이해의 중심을 항해하는 작은 배가 되기로 결심했어요
어차피 알 수 없다면은 당할 만큼 당해봐야겠다는 오기가 생긴 거지요 오랫동안 바라보는 거예요
목이 부러지도록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어지럽고도 변화무쌍한 먹구름을 쫓아가는 고단한 일이지요
몸을 숨긴 채 자라나는 저 달과
물결에 젖지 않고 닿아있는 달빛처럼 말이에요
바로 그거예요
흐를 수만 있다면...